북한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6일째인 22일 ‘김정은 시대’ 개막을 공식 선언하며 ‘3대 세습’ 공고화에 나섰다. 오는 28일 김 위원장 영결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인민의 영도자’로 치켜세우면서 ‘속도전’을 내고 있다. 북한이 대내결속과 안정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그만큼 3대 세습 체제에 대한 불안감의 방증이기도 하다. 북한이 지난 19일 북·미 접촉에서 한·미 양국이 대북 강경책으로 선회할 것을 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이 같은 불안감은 1차적으로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다. 김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은 김 위원장을 중심으로 3년간 ‘유훈통치’를 실시했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식량난으로 수십만명이 아사하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김 부위원장도 김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유훈통치’를 실시하겠지만, 한·미 등의 지원을 얻지 못하면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북한은 이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김 부위원장을 ‘혁명위업의 계승자·인민의 영도자’로 명시하면서 이념적 결속을 시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김정은 체제’가 안정적이라는 신호를 내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한·미와의 협상에서 김 부위원장이 신뢰할 만한 카운터파트가 될 정도로 굳건한 대내 정치기반을 갖췄다는 신호라는 의미다.

이는 북한이 지난 19일 뉴욕채널을 통해 미국에 전달한 메시지와도 유사하다. 북한은 북·미 접촉에서 한·미가 김 위원장 유고 상태에서 강한 대북정책을 쓰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매우 강하게 갖고 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내부에 정통한 한 대북소식통은 22일 오전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미 뉴욕채널에서 북측은 미국과 남한이 자신들의 체제에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 등 외부로부터 체제를 위협하는 그 어떤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는 지난 19일 이뤄진 북·미 접촉이 양측이 서로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북측에서 우리 정세는 이런데 한·미 양국은 어떤 자세로 나올 것이냐를 확인한 자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4년 김 주석 사망 당시 한·미에서 ‘급변사태 임박설’이 대세를 이루면서 사실상 대북지원이 끊겼던 점을 감안하면 북한으로서는 이 상황이 재연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를 미리 한·미에 전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미가 최근 북한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대북 식량지원과 6자회담 재개 등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도 북한의 이 같은 불안심리와 우려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북한으로서는 합의 직전까지 간 미국의 24만t 규모 영양식 대북지원 등에 대한 ‘미련’도 적지 않다. 6자회담 재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내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받기 직전에 김 위원장 사망이라는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유훈’이라는 명분으로 한·미와의 협상을 이어가겠지만 김 부위원장 역시 강성대국을 위한 ‘정치강국’, ‘군사강국’은 이룬 마당에서 가장 핵심적인 ‘경제강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현미기자alway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