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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가 갔다, 70년대라는 내 창의 커튼도 내려갔다” 김민기가 갔다, 그와 함께 칠십년대라는 내 창의 커튼도 내려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 누군가는 본인이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한 시대의 창(窓)이 되는 경우가 있다. 허다한 사람들이 육십년대를 전혜린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았던 것처럼 나는 김민기라는 창을 통해 나의 칠십년대를 되돌아보곤 했다. 서울대 미대 선후배 사이였던 그와 나는 처음 공릉동 옛 서울 공대 연병장에서 만났다. 운동장 아닌 연병장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곳에서 교련실습이 열렸던 까닭이다. 우리들 스무 살 푸르른 청춘에게는 품새가 맞지 않은 교련복을 입고 패잔병처럼 어슬렁거리며 그곳에 모이곤 했다. 교관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뒤돌아보니 하회탈처럼 웃으며 거기 밍기형(우리는 그 당시 김민기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이 있었다. ‘나 좀…. 이따가 일이 있어서…. 좀. 부탁해도 될까.’ 대리 출석 이야기였다. 그는 쉬운 말을 몹시 어렵게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으며 일어선 그는 그렇게 연병장 아닌 운동장을 빠져 나갔다. 그는 당시 교련학점을 못 받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밍기형이 어느 날 신입생 환영 행사에 불리어 나왔다. 그렇다 불리어 나온 느낌. 그는 사람들 앞에 힘차게 걸어나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배밭이었고, 그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 당시 미대에는 유독 노래 잘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조소과의 이정선과 음미과의 현경과 영애 다음에 밍기형 차례였다. 쑥스러워하며 통기타를 들고 엉거주춤 선 그를 향해 친구! 친구! 가 외쳐졌고 그는 그 노래를 불렀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그렇다. 그렇게 나의, 아니 우리들의 칠십년대 또한 노랫가락처럼 흘러갔고 밍기형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하지만 그가 그 스무살 무렵 만들었던 노래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마치 무슨 비밀결사의 부호들처럼 퍼날려졌다. 칠십년대를 훌쩍 넘더니 팔십년대 구십년대 아니 시대를 넘어 마치 거센 물결처럼 혹은 함성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늘 뒤로 빠지기 잘하던 그는 어느새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있었고 때로는 투사와 전사의 깃발로 펄럭였다. 그럴때마다 나는 좀 불편한 느낌이 들곤했다. 분명 그의 남저음 속에는 저항의 몸짓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의 노래에는 곰삭아 우려낸 우리네 따뜻한 정서와 넉넉한 마음이 있다. ‘어두운 비’ 내려오는 세상도 해맑게 바라보려는 ‘아름다운 아이’의 시선이 있고 분노와 투쟁을 넘어서서 한사코 햇빛 환한 쪽으로 가려는 발길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노랫말에는 증오보다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였다. 병들어 누운지 3년 된 부모를 두고 서울로 가야만 하는 사연이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늙은 군인이 있으며 얼굴 여윈 사람이 있고, 그리고 꽃 없는 화단에 꽃을 피우려는 아이가 있다. 심지어 곧 죽을 늙은 개 ‘백구’에 대한 연민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못 집어내는 색채 언어가 있다. ‘새 하얀 눈’ ‘붉게 떠오르는 태양’ ‘들의 푸르름’ ‘어두운 비’‘황혼에 젖은 산’…. 허구한 날 실기실을 비운 미대생은 그렇게 언어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 뿐인가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정감어린 말들이 있다. ‘서산’ ‘무당벌레’‘오솔길’ ‘벌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움’ ‘떨림’ ‘눈물’ …. 그의 세계를 이룬 것은 사회적 상상력과 서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아는 그는 한마디로 자연과 자유의 들녘에 선 음유시인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김민기를 읽고 또 읽어낼 것이다. 부디 이 부분이 짚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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