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從北) 세력이 진보의 대표인 양 활개치는 것은 진보 진영이 좌표를 잃고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지 못한 탓이라는 지적이 높다. 한국의 진보는 한마디로 ‘민주 대 반민주’로 대표되는 ‘87년 체제’에 여전히 갇힌 채 새로운 이념과 좌표 설정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과거의 ‘영광’만으로 25년을 버텨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종북 세력이 진보에 뒤섞여 오히려 주도권을 확보하고 종국에는 진보 전체의 위기를 불러오는 상황마저 초래했다. 한국의 진보가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종북에 덜미가 잡힌 채 미래 세력으로 부상하는 건 요원하다는 것이다. 진보도 결국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대의 명분을 가져야 하는 만큼, 전문가들은 국민 요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시대의 진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진보=민주, 보수=독재’ 프레임,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 반미 민족주의 등은 한국 진보가 고수하고 있는 대표적인 낡은 가치들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0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민주와 반민주라는 민주화 시대의 논리를 민주화 이후에도 똑같이 가져가는 것은 맞지 않는다”며 “현재는 민주주의를 전제하고 앞으로 어떻게 가느냐 하는 관점에서 봐야지 진보는 민주고 보수는 독재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와 관련, “민주주의를 깨뜨리는 것이 진보에 포함될 수 있느냐”며 “이석기 사태는 진보가 아닌데 진보로 포장하는 현실을 반성하게 했다”고 말했다.

현재 진보의 패러다임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안병진(미국학)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진보 전반으로 보면 아직까지 박정희 시대의 프레임에서 움직이고 있고, 새로운 제안, 리더, 그룹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며 “운동권은 소수파로 머물러 있고, 안철수나 문재인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대안이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진보의 위기가 있다”고 평가했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진보 진영은 반미 민족주의라는 인식을 떨쳐야만 한다”며 “과거 1980년대에는 용인될 수 있지만 이제는 세계화, 정보화 등 시대가 변했는데 진보도 낡은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보가 제시하는 담론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일반 국민이 체감하기 힘들다는 문제점도 제시됐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진보 진영에서 담론 논쟁은 계속 있었지만 논쟁이 추상적이어서 밑으로 끌어내리지 못했다”며 “일반 국민이 진보가 지향하는 가치를 체감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으로 ‘눈에 보이는 가치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 ‘선명성보다는 국민의 요구 충족’, ‘한국형 사회민주주의’ 등이 제시됐다. 안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눈에 보이는 물질주의와 성장을 추구했다면 현재 한국사회의 업그레이드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협력, 공존, 공감”이라며 “현재 한국의 진보와 보수 양 세력이 이 점에서 세계적인 수준과 비교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과거 야당은 선명성을 강조했지만 지금은 선명성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됐다”며 “현재 국민들은 선명성보다는 국민이 요구하는 것을 누가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진보세력이 다른 이념을 찾지 못하면 사회민주주의로 정립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사민주의도 유럽에서 낡았고 도전이 있기 때문에 한국적 사민주의가 뭔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종 기자 hiromat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