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태워버린 듯 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경보 20㎞에 나선 김현섭(26·삼성전기).

김현섭은 대회 전부터 한국 선수 중 유일한 메달 후보로 주목받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동메달 따라”는 말을 했다. 덕담으로 건넨 말이 김현섭에게는 부담이 됐다. 스스로는 “부담이 없다. 반드시 메달을 따겠다”고 했지만 중압감은 어쩌지 못했다.

경기가 열리기 이틀 전 일이 터졌다. 명치에 통증이 왔다. 한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선수가 통증을 호소하자 깜짝 놀란 선수단은 급히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피검사를 했다. 의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통증으로 진단을 내렸다. 위경련은 아니었지만 호르몬에 이상이 왔다는 설명을 들었다.

병원에서 선수촌으로 돌아와 안정을 취한 김현섭은 경기 당일인 28일 오전에도 긴장을 했다. 대표팀 관계자들은 경기 직전 “(김)현섭이의 몸이 무거워 보인다”며 걱정을 했다.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린 후 선수끼리 견제하느라 페이스가 느렸지만 김현섭은 따라가기 벅차 보였다. 보는 이들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한 바퀴를 돌고 나서는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비는 9㎞에서 찾아왔다.

남자 경보 20㎞ ‘황제’ 발레리 보르친(25·러시아)이 페이스를 급격하게 올렸다. 선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김현섭은 거리가 약간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날 기온은 대구치고는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높아 땀이 비오듯 났다. 체력이 약한 김현섭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두 번째 고비는 16㎞ 지점에서 발생했다. 보르친은 여기서 다시 스퍼트를 하며 선두자리를 굳혔다. 김현섭은 1위는 포기한 대신 2위 그룹에서 끈질기게 경쟁했다. 초반 10위권이었던 순위를 6위까지 올렸고, 레이스 후반 5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김현섭은 16㎞에서 한계점까지 왔다. 체력은 모두 고갈된 상황. 여기서부터는 “어떻게든 골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메달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목표인 10위는 이루기 위해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김현섭은 이날 6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목표했던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메달보다 값진 자신감을 얻었다. 김현섭은 29일 오전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동안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큰 대회에서는 약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징크스를 떨쳐냈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구 = 이화종기자 hiromat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