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일 관계 복원을 요구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중재역’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외교중심축 이동)’ 정책의 핵심이자 이해관계와 직결된 한·미·일 3각 안보협력 진전을 위해서라도 한·일 간 과거사·영토 갈등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12월 초 아시아 순방에 나서는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한·일 갈등 해소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한 이유다. 동중국해에서는 한·일, 남중국해에서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을 중심으로 해양으로 확장하려는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미국의 ‘그랜드 전략’ 차원이기도 하다.

물론 계기는 중국의 급부상이다. 중국이 경제 분야를 넘어 외교·안보에서도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내 위기감도 상당히 커졌다. 중국이지난 23일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 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태의 진전”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미국이 최근 군사적 충돌 위험을 감수한 채 B-52 전략 폭격기 2대를 중국 방공식별구역으로 보낸 것도 사안의 심각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백악관이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대해 “불필요한 선동적 행위”라고 강력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마이클 오슬린 연구원도 “중국이 동아시아의 국제안보 질서를 성공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가능한 한 빨리 제 궤도에 올려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한·일 모두에 관계 복원을 더욱 강하게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일 관계 정상화가 궁극적으로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국무부·국방부 주요 인사의 한·일 순방 때마다 한·일 관계 정상화 및 한·미·일 협력을 강조해왔으며, 바이든 미 부통령도 한·일 양국에 유사한 내용을 주문한다는 전략을 세워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에는 과거사 문제를 청산할 수 있는 입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한국에는 일본의 그런 행동에 긍정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설득한다는 전략이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도 27일 “한·일 양국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으로, 바이든 부통령은 한·일 관계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미국의 입장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미·일이 이번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계기로 과거사·영토 갈등에 따른 ‘자중지란’을 극복하고, 3각 협력체제를 구축할지 주목된다. 일단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에는 3국 공동대응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높지만, 3각 안보협력을 위해서는 일본군 위안부 청구권이나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 정치적 쟁점이 해소돼야 할 뿐 아니라 지난해 무산된 한일정보보호협정 체결도 필요하다. 외교 소식통은 “한·일 관계는 그동안 수많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협력 및 발전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보영 기자 boyoung22@ 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