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7일 충남 공주시 우성면 반촌리 게이트볼장에서 하길남(왼쪽)·이종남 할머니가 포즈를 취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공주 = 김선규기자

“공이 1번이니까 1번 조끼를 입어야지. 내가 이래봬도 몇년 전엔 게이트볼 잘 쳤슈~. 마을 대표로 공주로 시합도 많이 나갔제.”

“공이 안 들어갔잖여. 이리 줘봐. 내가 한번 쳐볼게.”

지난 7일 충남 공주시 우성면 반촌리의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교각 밑에 마련된 게이트볼장. 하길남(93) 할머니와 이종남(94)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들과 재미로 게이트볼 놀이를 하고 있었다.

T자형 스틱을 쥔 하 할머니가 숨을 크게 고르고 탁 볼을 치자 10여m 떨어진 게이트를 간발의 차로 빗나갔다. 두 차례 더 시도했지만 공이 들어가지 않자 옆에 있던 이 할머니가 우격다짐으로 스틱을 뺐었다. 한 살 차이인 데다 아래윗집에 사는 두 할머니는 허물 없는 친구로 보였다. 우연인지 실력인지 게이트볼을 한 번도 쳐본 적 없는 이 할머니는 한 번의 시도에 볼이 게이트로 들어가자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주변에 있던 할머니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하 할머니는 “너무 오랜만에 치니까 잘 안 맞네유. 내가 허리 수술을 한 다음부터는 스틱을 거의 잡아 본 적이 없슈”라고 말하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반촌리는 ‘꽃내음 스포츠마을’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대부분 어르신들이 40~50대 ‘젊은이’들과 어울려 게이트볼과 족구, 배구, 배드민턴 등을 즐긴다. 하 할머니네는 동네에서도 ‘스포츠 가족’으로 통한다. 1917년 충남 목천에서 태어난 하 할머니는 타고난 달리기 선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살던 마을에서 꽤 떨어진 초등학교에 뜀박질로 통학했을 정도였다.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 1등 상은 하 할머니가 독차지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은 자식들이 이어받았다. 3남2녀 중 아들 셋이 모두 마을 대표 선수였다. 매년 8월 인근 귀산초교에서 우성면 체육대회가 열리는데, 32개 부락 대항전에서 반촌리가 매번 우승이나 준우승을 차지한 것은 하 할머니 자식들 덕분이었다. 아들 셋은 배구, 축구, 마라톤 등 못하는 운동이 없다.

자식들 얘기가 나오자 하 할머니는 “애들이 공부도 잘했슈. 큰 아들(54)은 화장품 회사 운영하고 있고, 둘째(50), 셋째(48)도 공주, 대전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슈”라고 침을 튀어가며 자식 자랑을 했다. 남편 노재형(95)씨는 젊었을 때 서울에서 회사에 다녔다. 하 할머니는 수십년간 주말부부를 해야 했다. 자식 키우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일꾼 한 명과 함께 직접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튼튼한 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평생 동고동락했던 남편이 올해 초 치매로 인근 요양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하 할머니도 디스크 수술 여파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한다. 그는 “허리 때문에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죽겄슈”라며 남편에게 자주 가지 못하는 심정을 전했다.

하 할머니에게 장수 비결을 물었다. “밥은 조금씩밖에 안 먹지유. 음식은 특별히 좋아하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유”라고 했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다. 하 할머니의 장수 비법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으로 몸이 단련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 할머니는 지금도 오전에는 둘째 며느리를 도와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교각 밑으로 와 동네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게이트볼 게임도 구경한다.

이종남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뿐 다른 신체 기능은 멀쩡했다. 옆에 있던 한 할머니는 “저이는 지금도 고추도 따고 마을 일도 조금씩 거들어줘. 하여튼 옛날부터 부지런히 움직이지”라고 했다. 이 할머니의 장수 비결은 부지런함에 더해 식습관에 있는 것 같다. 소식과 채식이 기본이고 특히 몸에 좋은 시래기국과 된장을 좋아한다고 한다. 2남4녀를 둔 이 할머니는 “공주에서 포목전 하는 아들이 자주 와서 돌봐주니까 외롭지 않다”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공주 = 김충남기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