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가벼운 역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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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하고 지루했다. 지난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극작(연출)가의 명성을 무색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재일 한국계 극작가 겸 연출가로 ‘야끼니꾸 드래곤’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정의신 씨는 당초의 기대에 못 미치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물론, 표면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는 있었다.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을 딛고 화해와 우애의 정신으로 미래를 헤쳐나가자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가 매우 피상적일 뿐더러 주역을 비롯한 캐릭터 또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역사의식이 대단히 얕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연극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땅. 1924년 경성 근처의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해 이곳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랑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 대표적인 주인공은 세 명이다. 우선, 조선인 전처(前妻)를 잊지 못하는 일본인(조선인 피가 섞여 있다) 기요히코. 그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죽은 조선 여인 춘생을 잊지 못해 춘생과 닮은 일본 여자 마쓰요와 결혼하고 은밀히 조선인의 항일활동을 지원한다. 또 한 명의 일본인 나오키는 조선 백자를 사랑하고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일본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추방당한 인물이다. 그는 남사당패의 꼭두쇠 이순우와 형제의 연을 맺는다. 이를 중심으로 기요히코가 일본에 버리고 온 아들 아키히코, 마쓰요를 사랑하는 탈영병 야스오 등의 이야기가 멜로드라마처럼 얽히고설킨다.

다시 말해, 주인공 세 명은 남사당패의 꼭두쇠인 조선인 이순우, 그와 의형제를 맺은 일본인 나오키, 조선인과 일본인의 피가 반반씩 섞인 기요히코 등이다. 이들 중 순우는 당연히 조선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오고, 나오키는 조선에 매우 ‘동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양쪽에 발을 걸친 기요히코 역시 항일 독립운동을 돕는 의리파로 묘사된다.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탄압과 수탈의 역사를 정확히 반영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양심적인 일본인’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극 중 주요한 배경 사건으로 묘사되는 수원 제암리 참변에 대해서도 작가는 사건의 피해 당사자를 등장시키지 않고, 단지 기요히코의 조선인 전처가 그 사건에서 희생됐다는 식으로 그리고 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기요히코는 아내를 남겨두고 ‘나는 일본인이다’라고 외치며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를 두고두고 참회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참극이었던 제암리 사건에 대해 단지 괴로워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에둘러 변명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그래서 극의 말미, 나오키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 “불의 전차를 나에게 다오. 결코 마음의 투쟁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검을 헛되이 잠재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칠 때 그 외침은 관객에게 전혀 와닿지 닿고 공허한 메아리로 겉도는 것이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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