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부터 갑자기 1300~2000여년전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과 중국 간에 이른바 ‘역사전쟁’이라 표현되는 분쟁아닌 분쟁이 돌출해 우리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고구려사를 중국 내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보고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동북공정’)이 알려지면서 국내 학계나 시민단체 모두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 고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학계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점을 들면서 잘못하다간 대동강 이북과 가야 및 영산강 일대 등 남부지방이 우리 고대사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이처럼 고대사를 놓고 첨예한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역사분쟁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무엇보다 적합한 책입니다.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 각석’ 등 이 책에서 다뤄진 18개의 고대 금석문 중 특히 ‘덕흥리 벽화고분 묵서명’과 ‘칠지도’, ‘광개토왕릉비’ 등이 한·중·일 간에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물론 책은 금석문이라고 할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비문이나 묵서명 같은 문자 자료에만 한정하지 않고 청동기시대 문양과 암각화, 백제시대 인각와, ‘양직공도’ 중 백제사신도 등 한국 고대사 이해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그림 자료들도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종훈(대구가톨릭대)·여호규(한국외대)·김태식(홍익대)·송호정(한국교원대)·전호태(울산대) 교수 등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18명의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소속 학자들은 단순한 내용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해당 자료의 연구사까지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어놔 독자들에게 고대사를 보는 인식의 변천까지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여기에서 금석문 자료를 통해 한국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연대기 자료를 비롯해, 각종 문집 등 문헌자료가 징그러울 정도로 많거나 상대적으로 풍부한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 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기본자료인 한국 고대사의 경우 이따금씩 발굴되는 금석문 자료의 중요성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책에서도 소개되는 백제 무령왕 부부의 지석과 ‘냉수리비’, ‘봉평비’ 등이 처음 발견됐을 때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쓸 자료라며 학계가 흥분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된 현실을 기억하면 금석문 자료의 가치도 이해가 될 겁니다.

고려시대 여러 전승자료를 모아 편찬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해 금석문은 바로 삼국시대 당시의 생생한 자료이기 때문이지요. 법흥왕의 아버지인 사부지 갈문왕의 로맨스를 살펴 볼 수 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의 명문과 같이 금석문은 고대사의 미스터리를 푸는 정보의 보고입니다.

‘무령왕 지석’ 등 이 책에 소개된 금석문 자료들은 일제 관학자들의 초기기록 불신으로 상처를 입었던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새삼 확인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연대기 자료를 결정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제한된 정보를 담은 단편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극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책에서 전호태 교수가 소개하고 있는 ‘덕흥리 벽화고분 묵서명’이 바로 그러한 단적인 사례입니다. 1976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발견된 이 벽화고분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 시대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입니다.

발견 당시 북한 학계는 고구려가 4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중국 허베이(河北)와 산시(山西)지역을 포함한 유주 일대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라며 몹시 흥분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진의 출생지와 그가 지낸 관직을 놓고 고구려 신도(信都)에서 태어나 3품 관위에까지 오르고 고구려가 새로 개척한 광대한 땅 유주의 자사를 지냈다는 북한 학계의 주장과 중국 전연(前燕)의 신도에서 태어나 전연 모용씨 정권의 중심관료로 성장해 전연 혹은 후연(後燕)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냈지만 나라가 망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라는 중국 학계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과 일본 학계도 진을 중국인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인 편입니다. 특히 북한 학계가 이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유주 설치와 지배를 주장하는 반면 중국과 일본 학계는 같은 자료를 고구려가 유주를 설치한 적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란은 ‘안악 3호분 묵서명’의 해석에서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망명한 동수(冬壽)의 묘나 아니면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 등의 무덤인 고구려 왕릉이냐가 그것인데, 이 경우에는 주체사관에 바탕한 고구려 정통론을 확립하기 위한 북한 학계의 현실적 입장이 연구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라고 전호태 교수는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둘러싸고 한·일 학계가 100여년이상 논란중인 ‘칠지도’와 ‘광개토왕릉비’ 등의 문제를 보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얼마나 자국에 유리하게 고대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과도한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며 국사의 해체까지 이야기되는 한편에서 세계 어느 지역보다 내셔널리즘과 자국의 이해에 바탕한 역사해석에 집착하는 곳이 바로 동아시아 3국이며, 이중에서도 한국의 처지가 중국과 일본과 비교할 때 결코 유리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