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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측정도구 조사 종합

‘극심한 울분’도 10% 넘어
무력·절망 경험 많다는 방증

한국 사회에 ‘울분’ 감정이 현저(prevalent)한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4명은 일상생활에서 오래된 울분을 겪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7일 외상후울분장애(PTED), 스위스 베른대 연구진이 개발한 자기측정도구(BEI)를 적용한 최근의 다섯 가지 조사를 종합한 결과다.

응답 자료를 ‘극심한 울분’ ‘지속되는 울분’ ‘이상 없음’으로 구분한 결과 ‘극심한 울분’은 전체의 10%가 넘었다. 모집단 특성이 달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자료의 4배 이상으로 높은 수치다. 여기에 ‘지속되는 울분’을 더해 산출하는 ‘만성적인 울분’은 무려 전체의 43.5%에 이른다.

이 결과에서 울분이 높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만큼 이 사회에 억울하고 화나고, 그와 함께 깊은 무력감과 절망감이 복합된 울분을 일으키는 불공정한 생애 경험이 많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부정의(不正義)하다는 것은 그 사회의 누군가는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이 생겨 심한 모욕감을 안기고, 또 그 일로 인해 그가 중요하게 여긴 관계나 역할에서 배제되거나 거절당하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다.

그 사람이 품은 ‘이 세상은 공정하며 나는 세상으로부터 공정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는 신념을 위협하고 무너뜨린다. 울분은 그렇게 누군가의 ‘부서진 신념’에서 온다.

통계 자료만을 본다면 울분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건강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울분이 높을수록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우울감을 높이고 수동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도록 만든다. 또한 울분이 높을수록 효능감과 신뢰라는 개인적·사회적 자본이 고갈되고 혐오하는 대상을 늘린다. 반대로 삶의 도전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낮춘다.

이처럼 이 사회에 울분이 현저하고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이 분명하면, 더는 울분을 개인에게 귀속된 감정으로 방관해서는 안 된다. 울분 감정을 유발하고 악화시키는 사회의 문제를 찾아 이해하는 노력과 실천으로 이동이 필요하다. 부정의를 양산하는 사회의 변화 없이 개인에게 맡겨진 울분 극복이나 예방법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명순 서울대 울분융합연구팀 총괄(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