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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권 경제평론가 前 자유경제원장

산업은행이 지난 11일 자구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STX조선해양은 법정관리는 면했지만 갈 길은 멀다.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이 애초에 요구한 것은 ‘인건비 75% 감축 등을 통한 고정비 40% 감축’과 인력 구조조정이었다. 그런데 STX조선 노사는 구조조정 대신 5년 동안 기본급 5% 삭감에 상여금 600%를 300%로 삭감 등 임금 삭감안을 제출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지만 STX조선이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정부가 개혁을 추진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다.

기업은 국가 경제발전의 핵심이다. 한 국가의 경제발전은 기업의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기업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이윤을 창출해야, 그 기업을 통해 많은 종업원이 먹고살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의 이윤 창출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조선산업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업종이므로, 더욱 치열하다. 조선산업이 생존하려면 경제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적응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퇴출될 수밖에 없다.

한 기업의 퇴출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STX 조선이 청산되면 1300여 명의 정규직과 많은 협력업체의 일자리는 사라진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래서 정부가 필요하다. 기업의 어려움이 단기적이면, 일시적인 정부 지원으로 얼마든지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기업의 단기적 위험을 정부가 부담함으로써, 소중한 기업을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에 앞서서, 반드시 선행돼야 할 필요조건이 있다. 스스로 개혁할 의지를 보여주는 기업에만 정부 지원이 따라야 한다. 정부 지원은 바로 국민의 세금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세금은 공익 증진이란 뚜렷한 징조가 있을 때 집행돼야 낭비되지 않는다. 정부가 STX조선에 요구한 자구안에는 75% 생산인력의 감축을 포함돼 있었다. 이미 8조 원의 혈세가 투입됐는데도, 대부분 생산인력의 감축이 자구안에 포함된 것은, 그동안 스스로 개혁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국민 혈세 8조 원이 이미 낭비된 것이다.

6·13 지방선거가 꼭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가 경제를 표 얻는 수단으로 활용하면, 그 나라 경제는 망가진다. STX조선에 대한 정부의 행태를 보면, 그 징조가 보인다. 8조 원이란 혈세가 낭비됐는데도, STX조선은 스스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방선거에서 정부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정부가 스스로 개혁의 고삐를 거둬들인다면 공짜 지원에 맛들인 기업은 더 많은 공짜 지원을 원하게 된다. 기업 퇴출에 대한 정부 정책은, 정확한 개혁 방향 제시와 단호한 집행이어야 한다. 정부가 정치 일정을 고려해서 개혁을 주춤하는 순간, 퇴출 위기에 있는 기업은 자구책이 없는 돈 먹는 하마가 돼 버린다.

자구책을 통해 스스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는 기업에는 정부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이미 투입된 8조 원은 ‘매몰비용(sunk cost)’으로 생각해야 한다. 경제학 원론에서 가르치는 매몰비용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아깝다고 기업 퇴출을 미적거리면, 더 많은 혈세가 계속 투입되는 또 다른 어리석은 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는 ‘조용한 다수’보다 ‘시끄러운 소수’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다수는 합리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이, 자신이 낸 세금이 스스로 개혁을 마다하는 기업의 흥청망청 경영에 투입됐다고 각성하는 순간 거대한 반발은 잠재울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