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자 절필 선언 계기된 ‘미인도’ 사건

김재규 압류품서 첫 발견
국립현대미술관에 넘겨져
1991년 기획전 포스터 판매
법원 ‘위작 판단불가’후 절필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 등 미술계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과학적 감정과 작품의 경로 등을 통해 일관되게 진품이라고 주장해왔다.

문제가 미궁에 빠진 것은 작가 자신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데다, 미술품 위조 사범으로 구속 수감된 권춘식 씨가 “자신이 그렸다”고 검찰에서 진술하면서다.

이에 대해 미술계는 권 씨의 진술에서 ‘위작’을 제작했다고 주장하는 시기가 작품이 실재한 시기보다 늦고, 이미 위작 시비가 일어나기 전에 실렸던 ‘도록(圖錄)’이 나온 점 등을 들어 진술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작가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데, 더 할 말이 있는가”라는 주장에 막혀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여류화가로 명성을 날리던 천 화백이 ‘미인도’ 시비에 휘말리게 된 배경에는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가 있으며, 1979년 10·26 사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재산 압류 과정에서 상당수 미술품이 나왔고,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을 그린 인물화가 그중 하나였다. 당시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은 천경자의 작품이라고 확인했고, 그림은 국가로 환수돼 국립현대미술관에 넘겨졌다. ‘미인도’라는 제목은 당시 검찰 직원이 압수품 분류 목록을 만들며 붙인 것이다.

위작 시비가 처음 불거진 건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기획전에서 미인도를 전시했고, 그 이미지로 행사 포스터를 인쇄해 홍보와 판매에 활용했다. 이를 본 천 화백이 미술관에 “내 그림이 아니다”고 통보했고, 공개적으로 “자기 자식을 모르는 부모가 있는가.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술관이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의뢰한 감정에서 ‘진품’이라고 결론이 나왔다. 화풍과 천 화백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이 그 근거였다. 미술계에서는 또 위작 시비가 생기기 전인 1990년 1월 출간된 ‘한국근대회화선집’(금성출판사) 중에 이 작품이 들어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지만, ‘작품의 진위에 대한 판단은 작가의 의견이 최우선’이라는 ‘화랑협회 감정 내부 규정’ 등을 내세우며 위작 시비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법원마저 ‘판단 불가’ 판정을 내렸고, 천 화백은 절필(絶筆)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1999년 미술품 위조범으로 붙잡힌 권 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내가 그렸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미인도 시비가 재연됐다. 권 씨는 자신이 1984년에 문제의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했지만 미인도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된 것은 1980년이어서 시간 자체가 맞지 않았다.

명백한 시간의 오차가 있었지만, 권 씨의 한마디에 논란은 다시 이어졌으며, 천 화백이 지난해 별세한 뒤 유족들이 위작 여부를 가려달라고 제소를 준비하면서 논란은 계속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권 씨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기존의 주장을 번복하며 시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