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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마중 / 이종묵 지음 / 태학사

조선시대 삼대(三代)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가문의 서영보. 그가 환갑을 맞아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난다. 마침 가을이 깊었던 모양으로 서영보는 여행 중에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던 친구 이만수에게 금강산 절경을 묘사한 편지와 함께 붉게 물든 단풍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보낸다.

단풍이 금강산을 온통 물들인 모습을 친구와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 단풍가지를 받아든 이만수는 답신으로 함흥에서 일출을 감상한 느낌을 적어보내면서 서영보가 보내온 단풍잎과 편지를 엮어 시첩으로 묶어 함께 띄운다. 이렇게 단풍잎을 더해 만들어진 시첩이 바로 ‘홍엽첩(紅葉帖)’이다.

그 뒤 이 시첩은 서로 돌려보고 인연을 따라 손을 거치면서 그 뒷장에 시문들이 줄줄이 이어붙었다. 비록 지금은 그 시첩이 전하지는 않지만, 이리저리 전하는 시첩 속의 문장들이 어찌 이리도 그윽하고 빼어난지…. 어디 글솜씨뿐일까. 당대 최고 명문가 지성들의 풍류와 그들이 나눈 살가운 교우 역시 더없이 아름답다.

이 책은 옛사람들의 그윽한 풍류가 묻어나는 한시(漢詩)와 옛글을 엮은 것이다. 한시와 이를 감상하는 길잡이 글뿐만 아니라 시를 쓴 이의 인물됨과 당시의 시대상 등을 함께 두루 풍성하게 엮어서 읽는 맛이 더하다.

앞서 든 홍엽첩의 이야기도 이만수와 함께 서영보로부터 금강산의 단풍나무 가지를 받았던 김조순이 묘향산을 오르며 지은 그윽한 한시 한 편을 소개하다가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온 내력들이다.

책은 월별로 단락을 나눠놓고 그 달의 계절에 딱 맞는 풍류를 읊은 한시를 모아서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월에는 무르익은 가을의 감나무와 국화의 그윽한 정취를 담은 한시를 소개하고, 1월에는 눈 속의 매화를 기리는 시편을 꺼내놓는 식이다. 책 맨 앞에 ‘9월’을 배치해 놓은 것은 아마도 출간 시기를 고려한 것인 듯하다.

책에 소개된 한시는 어느 것 하나 가려 뽑을 게 없을 정도로 계절의 아름다움과 소박한 살림살이, 그리고 서정이 물씬 풍긴다. 저자는 한시가 압축하고 있는 이런 서정을 마치 병풍처럼 펼쳐놓고는 주석을 달듯 맛깔스럽게 해설한다. 시편에 얽힌 뒷얘기들과 당시의 시대와 사회상 등도 충실하게 곁들이는 것은 물론이다. 책장을 넘길 때 간간이 곁들여지는 화가 송영방의 그림도 ‘그림으로 쓴 한시’처럼 운치 있게 어울린다.

가을바람 소슬한 고택의 대청마루에 앉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아쉬운 대로 아파트 베란다 창밖으로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읽는다 해도 좋겠다. 촘촘히 짜여진 글을 읽는 것도 보람 있겠지만, 간혹 이렇게 띄엄한 글로 공간을 그려보여주는 한시의 여운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딱 이즈음 손에 잡으면 좋을 책이다. 한시를 읽으며 옛사람들의 풍류를 느껴보겠다면 풀벌레 우는 가을철보다 더 잘 어울릴 계절이 또 있을까.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