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657년(효종 8) 해주정씨 정효준이 손자 정중휘에게 노비 7구(口)를 물려준 분재기. 과거 합격 축하연에 고관대작들을 초대한 뒤 즉석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바람에 전·현직 영의정인 정태화·김육 등 당시 조선 최고의 명사들이 증인으로 참여한 유례를 찾기 힘든 고문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657년(효종 8) 정유년 10월2일 해주정씨 종손인 정효준(鄭孝俊·1577∼1665·초상화)은 장손자 정중휘(鄭重徽·1631∼1697)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기념해 자신의 서울 집에서 축하 잔치를 열었다. 정효준은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敬惠公主·1436∼1473)와 부마(남편) 정종(鄭悰·?∼?)의 5대손이다. 정종이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하다 사육신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지만 그의 아들 정미수(鄭眉壽·1455∼1512)가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된 이래 8대가 봉군(封君)된 가문이다.

정효준은 문과에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하다 1618년(광해군 10) 41세의 나이로 소과(사마시)에 겨우 합격했지만 왕실과 연이은 혼인을 맺은 공신가의 후손인 데다 아들 5형제가 문과에 급제(잔치 당시에는 4형제가 합격)해 현달한 가문인 덕분에 내로라하는 서울의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했다.

술이 돌고 잔치가 무르익을 때쯤 80세의 정효준은 26세의 손자 정중휘를 위해 준비한 깜짝 이벤트를 진행했다. 즉석에서 모두 7명의 남자종과 여자종(노 3, 비 4명)을 손자에게 별도로 준다고 밝히고 아들이자 정중휘의 숙부인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정익(鄭木+益)에게 분재기(分財記·재산을 나눠주는 문서)를 작성하게 한 뒤 잔치에 참석한 고관대작들을 증인으로 삼아 서명을 받은 것. 그런데 기꺼이 분재기에 증인으로 참석하게 된 고관대작들의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영의정 정태화와 전임 영의정인 영돈녕부사 김육을 비롯해 형조판서 윤강, 이조판서 홍명화, 병조참판 조행, 한성부좌윤 여미재, 성균관 대사성 윤문거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송시열의 문인이자 김창협의 스승인 이단상과 오준, 민희 등 17세기 중엽 조선의 정치 및 학계를 이끌던 명사 34명이 분재기에 자신의 품계와 관직, 성명을 적은 뒤 수결(手決·서명 또는 사인)을 남겼다.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대부 이상은 성만 기재하고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지만, 문서 뒷면에 이들의 이름을 표시해 놓았다.

정효준의 맏아들이자 정중휘의 아버지인 정식(鄭植·1615∼1662)과 정석(鄭晳), 정박(鄭？i) 등 두 명의 삼촌도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행사의 주인공인 정효준·정중휘와 분재기를 작성한 삼촌 정익까지 포함해 이날 잔치에 참여한 총 40명의 명단이 확인된다.

17세기 전형적인 서울 양반을 대표하는 가문의 재산 나누기와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고문서가 발견됐다. 양주 해주정씨 대종가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정정길·이하 한중연)에 연구자료로 제공한 1300여 점의 문서 가운데 하나인 ‘정유시월초이일 장손 신급제 중휘처 별급성문(丁猶十月初二日 長孫 新及弟 重徽處 別給成文)’이 바로 그것. 가로 425.4㎝, 세로 98.6㎝에 달하는 분재기의 대부분은 증인으로 참석한 고관대작 34명이 자신의 품계와 관직 등을 손수 쓴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김학수 한중연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은 “과거합격 축하연에 명사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다 즉석에서 분재를 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바람에 여러 중신(重臣)이 증인으로 참석하게 된 유례를 찾기 힘든 자료”라고 말했다. 해주정씨는 17세기 남인에 속했지만 이날 잔치에 참석한 고관대작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서인의 실세들이었다.

분재기는 정효준이 증손자의 장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정흠(鄭欽·1557∼1635)을 떠올리며 여러 아들과 장손자의 과거급제를 기뻐한 뒤 어린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장손자에게 노비 7명을 별도로 주는 내용이다. 이들 노비는 모두 44세 점동(占同)과 그가 양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다. 관리나 부리기의 편리함을 고려해 경기 고양에 거주하는 일가족을 줬으며 점동을 제외하면 모두 10대여서 경제적 가치도 높다.

정효준의 집안은 차남 정익이 1642년 과거에 급제한 것을 시작으로 막내아들 정적(鄭木+責)이 1662년 과거 급제할 때까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과거 급제의 영광이 이어졌다. 해주정씨는 정효준의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뒤 오룡가(五龍家) 또는 ‘나무목(木) 항렬의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오목가(五木家)로 불렸다고 한다. 효종 임금의 사위인 정재륜이 1708년(숙종 34)에 지은 수필집 ‘한거만록(閑居漫錄)’에 해주정씨 5형제의 문과 급제가 서울 양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한중연 정서각(관장 이종철)은 오는 11월 ‘명가의 고문서’ 시리즈로 해주정씨 대종가 고문서 도록을 발간하고 12월 초 해주정씨 대종가 고문서의 의미를 밝히는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