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유재한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이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정책금융공사 사장 집무실에서 “투자 위험이 높아 시중은행들이 지원하기 어려운 틈새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신창섭기자

‘출범 6개월’ 정책금융공사 유재한 사장

경기에 완연한 봄이 찾아온 줄 알았는데, 또다시 위기다. 유럽발 재정위기는 글로벌 경제 도처에 잠복해 있는 복병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포스코가 대어(大漁)급인 대우인터내셔널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뒤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보였던 인수·합병(M&A) 시장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집무실에서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의 달인’으로 손꼽히는 유재한(55)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을 인터뷰했다. 지난해 10월28일 산은금융지주에서 분리해 출범한 정책금융공사의 초대사장답게 M&A 현황 및 신성장동력 산업 육성 방안 등 어떤 현안에 대해서도 자신감 있게 얘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최근 국내 M&A 작업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금호가 웅변해 주지 않느냐”며 “무리한 M&A로 몸집을 키우다가 잘못돼 리스크(위험)를 부담하는 걸 보여 준 셈”이라고 말했다. 반면 대우인터내셔널이라는 대형 매물이 시장에서 소화된 것은 낙관적 측면이다. 유 사장은 “경기회복세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며 “더블딥(경기회복 국면에서 다시 침체)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에 유럽 쪽 위기가 진정되면 M&A 시장도 좋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책금융공사는 현대건설(11.13%), 한국항공우주산업(30.10%)의 최대주주이며 5.50%의 하이닉스반도체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유 사장은 “하이닉스반도체는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며, 현대건설과 한국항공우주산업 등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점에 능력 있는 주인을 찾아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성장 산업 육성 위해 입체적인 지원체제 갖춰

‘타이밍의 예술’로 불리는 기업 M&A 시장의 흐름과 출범 6개월을 갓 넘긴 정책금융공사의 현주소에 대해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그의 집무실 테이블에 놓인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이라는 책을 살펴봤다. 혹시 인수 의사가 있는 기업 경영자의 심리 상태까지 치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요즘 뭘 잘 잊어버려서 이 책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 유 사장의 말이다. 그는 “뇌에 자극을 줘 사람도 로봇처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내용이 흥미로웠다”며 “뇌에 대해 평이하게 쓴 책인데도 어려워서 한번 더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책금융공사는 녹색과 신성장동력 산업 등 미래 산업에 자금의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올해 6조원이라는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게 된다. 정책금융공사가 새로 도입한 선진금융기법인 온-렌딩(On-lending) 대출도 성공적으로 정착돼 5월 현재 이 분야에서만 올해 공급목표 2조1000억원 대비 50%(1조465억원)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온-렌딩 대출이란 정책금융공사가 자금을 출자하면 시중은행이 이를 집행하는 간접적인 중소기업 지원방식이다. 뇌과학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는 신성장동력 산업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정책금융공사 사장의 덕목 중 하나다.

유 사장은 “녹색금융팀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녹색인증기업 지원 방향을 연구할 계획”이라면서 “녹색투자회사를 설립해 녹색기업에 대한 투자를 지원할 계획이며, 이를 위해 감독당국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유 사장은 또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금융이 일자리 창출에 미치는 상관관계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용역을 줬다고 했다.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과 격주 목요일 아침을 이용해 직원들과 세미나도 갖고 있는데, 신성장 산업에 대한 직원들의 창의력을 도출해 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나 자신부터 신성장 산업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했습니다. 지금까지 28차례의 세미나를 가졌고, 어지간한 산업은 다 섭렵했습니다. 오늘(17일)은 전시컨벤션 산업이 주제였는데, 3명의 직원이 팀을 이뤄 발제문을 잘 만들어 왔더군요. 직원들에게 ‘한번 고생해 발표를 하면 100번은 다른 사람의 주제발표를 공짜로 들을 수 있지 않느냐’고 얘기해 줬습니다.”

하이닉스반도체 인수·합병, 금호 사태 이후 기업들이 겁내

대우인터내셔널이 포스코의 품에 안긴 뒤 이제는 또 다른 대어인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 대우조선 등의 M&A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질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3월 하이닉스반도체 주주협의회 소속 은행들이 하이닉스 지분 6.67%를 블록세일(지분 대량매매)할 때 정책금융공사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까지 관심을 표명한 기업은 없지만 최근 하이닉스의 경영 상황이 급격하게 호전됨에 따라 인수 의향자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반기(1~6월) 블록세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추후에 인수자가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도록 도와주고, 만약 적대적 M&A가 시도될 경우 소위 백기사(우호세력) 역할도 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하이닉스의 주인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며 “금호가 (M&A 과정에서의 실패 사례를) 많이 보여 준 데다 반도체 산업의 변동성이 크니까 기업들이 겁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17일 발표한 대규모 투자도 이를 추격하는 2, 3위 업체들로서는 큰 부담이다. 유 사장은 “삼성전자의 견제 세력으로 따라붙으려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 뒤 “정말로 하이닉스의 주인 찾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연말까지 현 체제로 가고, 그래도 인수 대상자가 안 나타나면 여러 가지 지배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포스코처럼 국민주 형태로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고, 사모펀드(PEF)를 통해 인수토록 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능력 있는 업체가 나타나서 인수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 최대한 빨리 매각하겠습니다.”

현대건설과 대우건설도 몸집이 크기 때문에 매각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유 사장은 현대건설 매각 문제와 관련해선 “대우건설이 잘 안되더라도 계속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늦어도 6월 말까지는 매각 공고나 주간사 선정 작업 등에 대해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 사장은 “정상화된 기업은 갖고 있지 않고 매각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며 “다만 동종 매물인 대우건설이 시장에 나왔기 때문에 산업은행이 PEF를 통해 대우건설을 인수하는 작업이 일단락되는 대로 현대건설을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단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차 물어봤다. 그는 “PEF를 통해 대우건설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이 조성될 때를 의미한다”며 “이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언제까지 끌려가지 않고 6월 말 전까지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 매각 절차에 대해서는 “6월이 되면 T50 고등훈련기 싱가포르 수출과 관련한 우선협상대상자가 발표된다”며 “이후 방위 산업 특성을 고려해 삼성테크윈, 현대자동차 등 민간 주주사와 향후 일정과 소유구조 등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은 대기업으로

금융위기 등을 이겨 내는 힘이 튼튼한 허리 격인 ‘중견기업 파워’라는 점은 이제 상식이 됐다. 정책금융공사의 중핵 사업인 신성장동력 산업 육성도 중견기업 육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중견기업으로 안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견기업이 되면 혜택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중견기업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과도기적 기간 동안 온-렌딩 대출 등을 통해 이들에게 자금을 공급할 예정입니다. 자금 공급 면에서 중소기업으로 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도록 해 중견기업 진입 장벽을 낮춰 주자는 것이 하나의 목표입니다. 또 한 가지는 중견기업 중에서 대기업으로 클 수 있는 곳들을 선정해 집중 지원할 계획입니다.” 유 사장은 “물망에 오른 기업이 2~3개쯤 된다”며 “시장 상황을 봐야 하지만 몇십 군데가 되더라도 괜찮은 기업들을 지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출범 6개월이 된 정책금융공사는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한창이다. 유 사장은 “인원 확충, 기반 조성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며 “이른 시일 안에 산업은행을 통한 위탁경영을 종료하고, 임원 선임 등을 통해 과도기 상태를 마무리 짓고 나면 자체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립 초기 100명도 채 안 되는 직원들이 규정을 만들고 기반을 다지느라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6개월간 신설 기관으로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15조원의 자본금 납입, 국가신용등급과 동일한 신용등급 획득, 조직 확충(직원 143명) 등 정책금융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유 사장은 “연봉제, 임금피크제 등을 도입해 불필요한 인력을 과도하게 채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작지만 강한 ‘강소(强小) 공기업’으로 진용을 갖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책금융공사의 신성장동력팀뿐 아니라 공사가 주주로 있는 대우증권의 애널리스트(100여명), 산업은행 연구 분야 등과도 연계해 제대로 된 신사업평가 및 기술평가를 할 계획이다. 그는 신성장동력 분야가 우리 사회의 경제발전축으로 우뚝 설 것으로 기대했다.

신성장 분야 지원의 핵심은 절차 투명성

“제대로 된 신성장 분야에 제대로 된 자금이 가도록 할 것입니다. 절차를 투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기업이 실패를 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경우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죠. 이 분야 사업 파트너로 들어가 융자뿐 아니라 투자도 병행할 계획입니다.”

정책금융공사는 국가를 대표하는 금융기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때는 금융 시장 안정 기능도 떠맡게 된다. 정부를 대표해 국외에서 외화를 조달하거나 금융안정자금·은행자본 확충 펀드 등을 활용,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유 사장의 풍부한 노하우와 통찰력이 신성장동력 산업의 건실한 밑거름이 되길 기대하는 사람은 정책금융공사로부터 직접적 지원을 받는 중소기업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책금융공사의 성공은 강소 선진국을 지향하는 한국의 성공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터뷰 = 예진수 경제산업부 부장대우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