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벽파에 의한 정조 독살설은 미스터리 소설의 요소가 다분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하나 역사적 진실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허구에 불과하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가 노론벽파의 영수 심환지(1730~1902)에게 보낸 비밀편지(어찰·御札)의 입수·해독·공개를 주도했던 안대회(한문학) 성균관대 교수가 ‘정조어찰첩’ 외에 여러 곳에 산재한 정조가 심환지를 비롯한 다른 신료들에게 보낸 어찰, 심환지의 문집, 각종 문집과 사서 등을 검토한 뒤 내린 결론이다.(문화일보 2월9일자 1·3면 참조)

안 교수는 이달 하순 출간예정인 ‘역사비평’ 87호(2009년 여름호)에 기고한 ‘어찰의 정치학:정조와 심환지’라는 글에서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정조의 정치성향과 성격을 살펴본 뒤 독살설이 허구라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 6첩(帖)으로 만들어진 어찰첩 가운데 첩으로부터 떨어진 한두 통의 편지는 1970년대 고(故)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뜯은 것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전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안 교수가 미리 배포한 논문에 따르면,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이전인 세손(世孫)시절부터 친척 및 측근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달필에다 속필로 편지를 썼던 정조는 평소 편지 왕래를 통해 주변 인물들을 끌어안고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안 교수는 정조가 워커홀릭이라 할 만큼 제왕으로서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성격은 다혈질이고, 흥분을 잘하며, 조급했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태양증(太陽症)이라고 스스로 진단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화병도 자주 나고 가슴의 심한 통증도 발생했다. 게다가 종기 등 오랜 지병에 시달렸던 정조는 서거 1년 반 전인 1799년 1월18일과 서거 13일 전인 1800년 6월15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중병임을 밝히고 있다. 이미 중병이 든 정조를 심환지나 정순왕후가 무모하게 독살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고, 또 이들을 극도로 미워했던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란 게 안 교수가 독살설을 비판하는 근거다.

특히 정조가 서거하기 직전인 1800년 5월30일 반포한 ‘오회연교(五晦筵敎)’에서 ‘노론벽파를 내치고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벽파가 독살음모를 꾸몄을 것이라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의 주장에 대해, ‘오회연교’는 남인과 시파의 등용이 아니라, 이서구 등 노론벽파를 등용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안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밝힌 것과 같이, 홍국영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종수의 상소 초본도 정조가 직접 지어보냈다는 내용 등 새로운 사실들을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또 정조가 학자 스타일의 세심하고 온화한 인품의 군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강경한 의리를 표방하는 당파를 키우려고 했고, 남과 각을 세워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태도를 옹호했다고 주장한다. 심환지와 그의 정적인 채제공을 높이 평가한 기준도 평소 모가 나게 처신하는 기상이었다는 것이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