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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판도시가 완성단계에 들어섰다. 1988년 일단의 출판인들이 발의를 하고 18년이 지난 지금, 모두 120여 출판관련 사업체가 입주한 명실상부한 책도시가 됐다. 세계 지식산업 사상 유례가 없는 책문화의 집산지, 2000년대 건축미학의 전시장, 생태환경을 고려한 도시건설 등, 출판도시건설과정 자체가 세계지식산업계의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기 파주시 교하면 문발리 한강변 26만평에 자리잡은 파주출판도시는 내부적으로는 이른바 하드웨어건설 과정을 마치고 그 인프라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산업이 중점적으로 입주할 2단계 출판도시 건설이 시작될 즈음에 있다. 파주출판도시의 건설이념을 만들고, 지난했던 건설과정의 해결사였으며, 때론 원칙주의자로, 때때론 유연한 현실주의자로 출판도시건설을 이끌어왔던 이기웅(67) 파주출판도시 이사장을 지난 21일 파주출판도시의 아시아문화센터 내의 찻집에서 만났다.

이 이사장은 파주출판도시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전망과 리더십을 다음 세대로 ‘아름답게 인수인계하는’구체적인 프로그램 등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출판도시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1988년 서울 올림픽때 출판단지 발의를 시작했으니, 벌써 18년 전입니다. 물론 출판인들의 협동사업에 대한 제안은 광복 이후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6·25전쟁 이후 곧바로 시작된 마포 출판협동조합 사업 등 그동안 선배 출판인들의 협동화 운동은 오랫동안 진행돼 왔습니다.”

―출판도시 프로젝트로 옮아간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이런 말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출판도시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북한산이 만들었습니다. 88년 즈음해서 윤형두 범우사 회장, 박맹호 민음사 회장, 허창성 평화출판사 사장,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 전병석 문예출판사 사장, 김언호 한길사 대표 등과 함께 북한산 등산을 하면서 마치 ‘도원결의’처럼 출판도시를 만들자는 ‘북한산결의’를 한 거지요. 제가 49세였고, 대부분 40대 후반~50대 초반이던 시절입니다. 북한산 산정에서 결의를 하고 89년에 조직을 만들었지요. ”

―출판도시를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출판계의 숙원이 유통현대화였습니다. 내가 처음 이 생각을 시작한 것은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 한 젊은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올림픽을 흑자경영해내는 과정을 보면서, 아… 공적인 일을 하면서도 잘 경영을 하면 흑자를 일궈내고 사회적인 순기능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과정에서 출판도시건설에 대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맨땅에 헤딩한 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혼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두 함께해서 성공의 열매를 함께 거두면 그 힘은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느낀 거지요.”

―계획을 세우는 것과는 달리 이를 실제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텐데요.

“지금도 많은 외국 전문가들이 파주출판도시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은, 꿈을 현실로 일궈냈다는 데 있습니다. 계획은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만, 이를 어떻게 실천해냈느냐는 거지요. 그것도 각자 이익요구가 다른 기업체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이런 공통 목표를 위해 매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나는 한국출판계 혹은 한국 지식계만이 가지고 있는 협동정신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모두 함께 70, 80년대의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 서로에 대한 어떤 믿음, 또 공동체 정신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협업프로그램이 가능했을 겁니다. 파주출판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이 된 정신은 우리가 항용 ‘80년대 정신’이라고 말하는 공동체정신입니다.”

―공동체 정신뿐 아니라 초발심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이끌어가는 리더십도 중요해 보입니다.

“분명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협동정신이란 모두 함께 구슬을 꿴다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누군가 쉬지 않고 구슬을 꿰야 합니다. 잘 안들어간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그나마 꿰던 구슬까지도 다 흩어집니다. 나 또한 구슬 꿰는 손을 놓고 싶을 때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만이라도 변하지 말자, 처음 생각했던 것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

―도시 완성을 앞둔 지금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파주출판도시가 중요한 것은 이를 우리 출판인들이 했다는 체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이 쌓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이 하면서 뭔가 일궈냈다는 것, 그런 경험을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주북시티는 세계 유례가 없는 지식산업의 집적체입니다. 하지만 자칫 출판산업의 집산지 정도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도시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물론 책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성 회복입니다. 인간다운 도시가 되기 위해선 당연하게 자연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도시가 돼야합니다. 그러자면 파주출판도시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건강한 집단과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건전한 교육단체, 도서관 운동, 우리말 살리기 운동 등 책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단체 등과 공동프로그램을 만들어 출판도시에서 생산된 책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파주출판도시가 책을 생산하는 것뿐 아니라 구체적인 독서운동, 양서 선정,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등도 함께 생산해내는 문화기지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또 이런 과정이 파주출판도시라는 거대 지적 인프라의 자산을 사회와 공유하고 사회로 환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가 건설단계였다면, 이젠 이 하드웨어 인프라를 토대로 문화콘텐츠를 생산해내는 단계에 돌입했다고 봐야겠군요.

“40대 후반에 발의해서 파주출판도시를 만들다보니 60대 후반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이 ‘시간과 싸워서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요즘 이 말을 새삼 떠올리면서 시간 앞에 진중하고 겸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주출판도시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지금 나는 건강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다음세대에게 착실하게 인계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야 비로소 내가 철이 들어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쉬어라’고 말하면서 또 ‘당신’들이 너무 소홀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소모전을 벌였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겸허하게 인수하고 인계하는 아름다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파주출판도시 2단계 사업도 곧 시작하지 않습니까.

“2단계 사업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1단계에선 너무 초석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이젠 성숙한 처녀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요즘도 파주출판도시에서 주무십니까.

“열화당에서 주로 기거하지만, 오늘은 집사람이 일산집에서 자라고 ‘명령’했습니다. 집사람이 나의 후원자입니다. 명령에 따라 오늘은 늦더라도 일산집에 갈 겁니다. 파주출판도시에서 자면 알게 모르게 자꾸 일을 하게 됩니다. 지난 일요일에도 도시 안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오랫동안 있었지요. 거기서 신구문화사에서 1966년에 펴낸 노벨상 문학전집(10권)을 샀습니다. 10권을 들고 밤 늦도록 권두언을 읽었습니다. 당대의 최고 석학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해서 권두언을 남겼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막내 편집위원일 정도입니다. 권두언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니, 아… 우리가 역사 위에 서있구나란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저 기라성같은 편집자들의 지식문화에 대한 확신에 찬 글들을 읽으면서 그 역사 위에서 출판도시가 서 있고 그 역사 위에서 출판도시를 가꿔가야겠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저 낡아가는 책들을 보면서 출판도시를 생각하는 거지요. 그렇게 일요일은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배문성 문화부장 msba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