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근대 예산의 기원은 1215년 영국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을 꼽는다. 군주의 주권(sovereignty)을 억제하기 위해 의회의 동의를 최초로 규정한 법적 문서이기 때문이다. 의회의 동의에 따른 세금 부과를 명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당한 조세권 행사에 제한을 두는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다른 나라로 전파된 이 제약은 헌법에 반영돼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작금의 인기영합적 정치 행태가 세금 부과의 원칙을 뿌리째 흔들고 있어 우려가 크다.

여야가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듯 감세정책을 앞다퉈 내놓는다. 국민의힘에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양극화를 이유로 들어 지방의 경우 다주택자 중과세 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 아울러, 상속세와 관련해서는 배우자에 대해서는 과세를 폐지하고 최고세율을 낮추며 유산취득과세 형식으로 바꿔 세 부담을 대폭 낮추는 방안을 내세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지난해 정부의 상속세법 개정에 반대하던 때와 달리 최근 상속세 일괄·배우자 공제액을 현행 10억 원에서 18억 원으로 올리고, 근로소득세 하위 과세표준 구간도 높이는 세 부담 경감 방안을 내놨다.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감세정책을 발표할 때 세수효과 추정과 함께 줄어드는 세수를 보완하는 대책도 내놔야 마땅하다.

이미 지난 2023, 2024년 각각 56조 원과 30조 원씩 세입예산 대비 세수결손을 기록해 국가채무가 크게 늘어나는 등 계획적이고 정상적인 살림살이의 궤도를 벗어나 있다. 올해도 예산편성 때 예측했던 경제성장률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의 성장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안정적인 세수 확보가 긴요한 시점이다. 포퓰리즘에 바탕을 둔 보여주기식 감세정책으로는 재정위기, 나아가 경제위기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의 관세·통상 정책으로 우리나라 수출기업의 경쟁력이 매우 어려운 여건이고, 비상계엄 이후 치솟은 환율은 안정화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주력 기업인 반도체 산업의 회복 기미는 보이지 않고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있다. 자동차 산업도 관세 폭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전망이며 자영업자들의 체감경기는 1997년 외환위기 시절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최근 법인세 비중이 커지고 자산과세 비중이 늘어나면서 세수가 널을 뛰듯 하고 있다. 1990년대 20% 수준이던 법인세와 자산과세 비중이 2011년 이후 33% 수준으로 늘어나 변동 폭이 매우 커졌다. 주요 세목이 다단계 초과누진세율 구조로 돼 있고, 최근 과표구간 수가 확대됨에 따라 똑같은 진폭의 과세 베이스 변화에도 세수 변동성이 더 커지는 구조라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조세정책은 선거를 겨냥해 선심성 깎아주기 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안정적인 성장과 국민 통합을 위해서는 증거에 기반한 중장기적 시계에서 국민 후생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편돼야 한다. 제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세법 개정안 96%가 세금을 깎아주는 ‘감세 법안’이라고 한다. 여야가 경쟁적으로 감세 법안을 내놓고, 특히 정부·여당의 상속세·종합부동산세 감세정책을 비판해온 야당이 제출한 감세 법안이 여당보다 많았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국민은 책임 있는 정당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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