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용 문화부 차장

대한민국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놓였다. 내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탄핵 후폭풍으로 어지럽고 여야는 정쟁만 거듭할 뿐 민생은 뒷전이다. 대외적으로는 ‘스트롱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 업무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압박이 상당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 역시 양극화되며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형국이다. 가치 판단을 내릴 명확한 기준은 온데간데없고, 이를 제시할 준거집단도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르는 곡이 있다.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미국 팝의 거장 빌리 조엘이 지난 1989년 발표한 ‘We didn’t Start the Fire’다. ‘우리는 그 불을 처음 지르진 않았어’ 정도로 옮길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불’은 중요한 현대사적 사건이나 인물이다.

4분 47초 분량인 이 곡에는 익숙한 이름과 사건이 잔뜩 등장한다. 미국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을 시작으로 존 F 케네디, 록펠러, 맬컴 X,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비틀스, 제임스 딘이 거론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중국 톈안먼 사태, 에이즈(AIDS) 창궐 등 100여 개의 역사적 키워드가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이 노래에 한국과 관련된 키워드가 4개나 담겼다. 먼저 ‘북한’(North Korea)과 ‘남한’(South Korea)이 각각 12, 13번째로 등장하고 메릴린 먼로, 로젠버그, 수소 폭탄, 슈거 레이가 언급된 이후 ‘판문점’(Panmunjom)이 등장한다.

1949년생인 빌리 조엘은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49년부터 이 노래가 발표된 1989년까지 40년간 전 세계에서 발생한 인상적인 역사적 사건과 그 주인공을 기록했다. 북한, 남한, 판문점은 1950년의 키워드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이승만’(Syngman Rhee)이다. 빌리 조엘은 1960년 부정선거 논란 속에 하야한 이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상황이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이었다는 뜻이다.

만약 빌리 조엘이 1990년부터 2024년까지의 세계 역사를 담은 후속곡을 발표한다면 아마도 ‘강남스타일’(2012), ‘BTS’(2020), ‘오징어 게임’(2021)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2024년은 어떨까? 재집권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과 더불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이름도 넣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시아의 맹주이자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의 상황은 역사의 주요 퍼즐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서 빌리 조엘은 ‘그 불’(The Fire)에 대해 “세상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언제나 타올랐다”며 “우리가 지핀 불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불에 계속 맞서 왔다”고 웅변했다. 불을 지른 사람을 색출하는 것보다 그 불에 맞서고 진화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조언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 즉 항상 대중이었다. ‘테스형’을 발표한 직후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못 봤다. 바로 여러분이 이 나라를 지켰다”는 가수 나훈아의 외침과 맞닿아 있다. 치우치고 호도된 주장을 거르고, 보다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옳음’을 좇는 대중의 역량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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