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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박경일기자의 여행

무산십이봉 휘감은 ‘비단 안개’ 지나… 유비가 숨 거둔 마지막 협곡에 닿다

박경일 전임 기자
박경일 전임 기자
  • 입력 2024-05-09 09:24
  • 수정 2024-05-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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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수 코스라면 삼협 중의 마지막 협곡이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하수 코스라면 가장 먼저 만나는 대문과 같은 협곡인 구당협의 웅장한 모습. 중국 돈 10위안 지폐 뒷면에 여기가 그려져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다시 열린 장강삼협 (2) 江따라 흐르는 전설·소설·옛시

무협, 직벽 가까운 협곡에 압도
사람 형상 닮은 신녀봉 바위에
초나라 회왕의 전설 등 전해져

10위안 지폐 뒷면 도안 구당협
협곡 빠져나가면 백제성 이어져
유비의 최후 장면 인물상 재현

사면받은 이백의 가슴 벅찬 詩
늙고 병들어 쓸쓸한 두보의 글
명소마다 위대한 시인의 흔적

저승을 테마로 한 ‘풍도귀성’
충칭 대한민국 임정청사 찍고
야경명소·도자기마을도 압권


이창·충칭(중국)=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지난주에 이어 계속

# 아름다움의 완결형… 무산십이봉

드디어 본격적인 ‘장강삼협(長江三峽·창장싼시)’ 항해의 시작이다. 이창(宜昌·의창)의 모평(茅坪·마오핑) 선착장에서 출항한 배는 밤새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무협’의 협곡으로 들어섰다. 장강삼협을 이루는 세 개 협곡인 서릉협(西陵峽·시링샤), 무협(巫峽·우샤), 구당협(瞿塘峽·취탕샤) 중에서 가장 좁고 험한 협곡 구간이 ‘무협’이다. 협곡의 이름에 ‘무당 무(巫)’ 자를 쓰는 건 글자의 형상이 이 지역의 산세와 비슷해서란다. 듣고 보니 ‘巫’ 자에서 사방이 닫히고 막힌 첩첩한 산중이 보인다.

협곡을 만드는 건 산(山)이다. 무협은 장엄하다. 강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직벽에 가까운 협곡의 벼랑이 우뚝 일어서 있다. 기이하고 압도적인 협곡의 면모는, 한숨 섞인 탄성을 부른다. 무협의 깊은 골짜기는 쓰촨 분지 동쪽의 크고 험준한 ‘대파(大巴·다바)산맥’ 사이로 장강 물길이 깊게 파고들어 만들어낸 것이다. 오죽 골이 깊었으면 무협으로 접어들면,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까.

무협 일대의 12개 산봉우리를 일러 ‘무산십이봉’이라 부른다. 12개 봉우리에는 하나하나 이름이 있다. 조운(朝雲), 집선(集仙), 비봉(飛鳳), 등용(登龍)…. 이름마다 구름과 신선, 봉황과 용이 등장한다. 무산십이봉 12개 봉우리는 신선이 사는 선경(仙景)을 상징한다. 당나라에서는 무산십이봉을 모방해 정원을 꾸미는 게 대유행이었다. 유행은 국경을 넘어 신라로까지 전해졌다.

신라 때 무산십이봉의 경치를 본떠 조성한 대표적인 정원이 경주의 ‘동궁과 월지’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무산십이봉은 ‘신선정원’의 뼈대가 됐다. 주로 연못의 가운데 섬으로 두는 석가산에다 무산십이봉의 형태를 모방해 정원을 꾸몄다. 경남 진주의 용호정원도, 충남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 앞마당도 그렇게 다듬어낸 조경이다. 군산 고군산군도의 12개 섬은 아예 ‘무산십이봉’이란 지명을 통째로 가져다 그대로 쓰고 있다.

옛사람들이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여겼던 곳. 가보지 못해서 마음속으로 흠모만 하고 있던 곳. 무산십이봉에 대한 기대로 무협에 들어서는 장강 리버크루즈 센추리글로리호의 객실 테라스에 앉아서 새벽의 여명을 보았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무협의 무산십이봉 가운데 하나인 신녀봉. 봉우리 뒤에 사람 형상으로 작고 뾰족하게 솟은 것이 신녀바위다.



# 무협의 안개가 품은 이야기

무협의 명물은 안개다. 중국의 옛 시인들은 무협의 안개를 두고 ‘얇은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고 찬탄했다. 그런데 매연의 도시에서 온 여행자에게 뿌옇고 흐릿한 무협의 안개는, 비단은커녕 ‘자욱한 미세먼지’처럼 여겨졌다. 대기 질 측정값이 항해 내내 ‘좋음’이었으니, 이성적으로는 그게 미세먼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랬다.

무협의 안개와 관련해 중국 멜로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고 했다. 주로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의 추궁에 답하는 남편의 대사란다. “바다를 본 사람은 강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무협의 안개를 본 사람은 세상의 안개가 안개로 보이지 않는다.” 당나라 때 시인 원진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연작 시의 한 대목에 따온 대사다. 말인즉슨, 아내가 ‘(아름다운) 무협의 안개’여서 다른 안개(여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아내 사랑의 진심’을 토로하는 말인데, 무협의 안개가 다른 안개와는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걸 누구나 다 수긍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좀처럼 흔쾌한 마음이 들지 않아 주머니 속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며 되묻고 싶었던 질문. “이게 그렇게 아름답다고?”

삼협 중 무협이 으뜸이라면, 무협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신녀계(神女溪·선뉘시)’ 일대다. 장강에 바짝 붙어 솟은 신녀봉(神女峰)에서 이름을 가져온 협곡이다. 신녀봉의 거대한 암봉 뒤쪽에는 기이하게 삐죽 솟은 바위가 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화 속 서왕모의 막내딸 요희가, 무산 산봉우리에 머무르며 오랜 세월 거친 협곡을 지나는 뱃길을 보살피다 돌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장강에 배를 띄우고 이 구간을 다니는 뱃사람들에게는 신녀봉 뒤편의 바위가 필시 호리호리한 사람 형상으로 보였을 터. 신선의 경지를 이룬 자연에 사람을 닮은 기이한 바위 이야기가 덧대어지면서 신녀를 둘러싼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무산운우(巫山雲雨)’의 고사(故事)다.

고사 속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초나라의 회왕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부인이 와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길 원했다.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에 부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라고 했다. 그 뒤로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을 일컫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이란 말이 생겨났단다.

배가 신녀계 선착장에 닿자 이슬처럼 흩뿌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졌다. 구름과 비가 된다던 부인의 현신일까. 무산의 산정에는 그림처럼 운무가 피어올랐다. 경치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인문이 되는 곳. 무협은 금세 안개와 구름으로 가득 찼다.

# 삼국지를 읽어야 하는 이유

신녀봉 맞은편의 좁은 협곡이 신녀계다. 신녀계 선착장에 정박한 배에서 내린 손님들은, 정원이 열댓 명 정도인 작은 목선으로 갈아타고 가늘고 긴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유유자적한 ‘뱃놀이’다. 협곡이라기보다는 ‘수로’라 부르는 게 맞겠다 싶을 정도로 계곡이 좁다. 협곡이 15㎞쯤 이어진다고 했다. 이 중 10㎞ 정도 구간이 골이 깊고 물살이 거세 접근이 어려웠던 오지였는데, 삼협댐 건설로 물이 차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아름다운 경관이 밖으로 알려져 장강삼협의 대표명소가 됐다.

승객들이 작은 배로 갈아타고 수로 신녀계 협곡을 탐험하는 동안, 다른 크루즈를 타고 온 이들은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정의 전망대로 향했다. 같은 장강삼협을 운항하는 크루즈라고 해도 기항지가 같지 않았다. 기항지가 같다고 해도, 관광코스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까마득하게 올려다본 신녀봉 뒤쪽에 운행 중인 케이블카와 전망대가 보였다. 저 높은 곳에 올라 협곡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떨까.

이걸 하면 다른 배가 하는 저게 궁금했고, 저걸 하면 이번에는 이걸 하는 다른 배가 부러웠다. 그러다 이내 깨닫게 된 건 어떻게 해도 장강삼협 경관을 마음에 차도록 다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크루즈 기항 관광지는,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여기면 될 듯했다. 고속도로에서 모든 휴게소를 다 들를 수 없는 일. 어떤 차는 이 휴게소를 들르고 다른 차는 저 휴게소를 들르지만, 전체의 여정을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지 않은가.

장강삼협 크루즈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를 못 보았다면, 반드시 다른 곳에서 벌충을 한다. 장강삼협 크루즈의 평균 시속은 20㎞ 남짓. 뛰는 것보다 느리다. 조바심 없이 이 속도에 맞춰서 여행하는 게 장강 크루즈 여행의 요령이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는 조언 한 가지. 장강삼협 크루즈를 잘 여행하는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책 읽기’다. 여행의 ‘본전’을 생각한다면 장강삼협 일대를 주유하던 시절의 이백이나 두보의 시와 함께 ‘삼국지’ 정도는 읽자. 삼국지 독파가 버겁다면, 관우가 죽고 난 이후부터 유비의 죽음까지의 대목만이라도 읽고 가자. 읽고 나면, 보이는 게 다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백제성의 탁고당에 재현된 유비의 유언 장면. 죽음을 앞둔 유비가 왼쪽의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하는 모습이다.



# 유비가 숨을 거둔 자리… 백제성

무산을 떠난 배는 삼협의 마지막 협곡인 구당협을 지난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수(上水) 코스에서는 마지막 협곡이지만, 강을 따라 내려가는 하수(下水) 코스에서 구당협은 첫 번째 대문 격이다. 장강삼협에서 가장 짧은 구당협의 협곡은 웅장하다. 수직의 벼랑이 마치 열린 대문 형상을 하고 있다. 강을 가운데 두고 한쪽 벼랑이 백염산이라면, 반대쪽 벼랑은 적갑산이다. 강에 면한 두 산의 수직 절벽은, 마치 정으로 찍어서 쪼개놓은 듯하다.

구당협을 감상할 때는 중국 돈 10위안짜리 지폐를 꺼내 보자. 10위안 지폐 뒷면 도안이 구당협이다. 세필로 그린 구당협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실제 모습보다 지폐에 그려 넣은 구당협이 훨씬 더 근사해 보인다. 한눈에 주변 경관이 다 들어와서 그런 듯하다.

구당협은 서릉협이나 무협과는 달리 내려서 발을 딛는 곳이 아니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배 위에서 뒤돌아보거나, 배가 다 빠져나간 뒤 육지에 내려서 구당협을 본다. 구당협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백제성(白帝城·바이디청)’이 있다. 백제성은 자그마한 섬 안에 있다. 본래 육지였던 곳이 삼협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섬이 됐는데, 연륙교를 놓아 건너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백제성은 우리 삼국시대 국가 백제(百濟)와는 관계가 전혀 없다. 나라 이름인 백제의 한자 뜻을 풀면 ‘백성을 돕는다’는 것이고 ‘흰 백(白)’에 ‘임금 제(帝)’ 자를 쓰는 백제성의 백제는 ‘하얀 황제’란 뜻이다.

백제성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후한시대 장군 공손술이 황제가 되기를 꿈꾸며 쌓았다. 이름이 하필 백제성인 건, 성안 우물에서 상서로운 흰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좋은 징조’라 여긴 공손술이 자신을 흰 황제, 즉 ‘백제(白帝)’를 자처하면서 비롯한 것이다.

백제성이 손꼽히는 관광지가 된 건, 순전히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반대를 무릅쓰고 죽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 무리한 출정을 감행했다가 오나라 장수 육손에게 대패한 유비는, 죽음을 앞두고 급히 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촉한을 이끌어갈 아들 유선을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한 뒤에 여기 백제성에서 숨을 거뒀다. 그 당시의 장면이 백제성의 탁고당(托孤堂)에 인물상으로 재현돼 있다. 탁고당은 ‘고아를 부탁한다’는 뜻이다.

탁고당의 인물상 중에서 눈길을 붙잡은 이름이 ‘마속(馬謖)’이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에 등장하는 그 마속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마속을 등용하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제갈량은 이를 듣지 않고 전쟁에서 마속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 결국 마속의 경솔한 판단으로 전쟁에서 지자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처형했는데, 읍참마속이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백제성에 세워진 두보 동상.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으로 향하던 두보는 병이 깊어지는 바람에 여기 머물며 외롭고 쓸쓸하게 2년을 보냈다.



# 여행을 안내하는 인플루언서, 이백

여행명소와 여행정보를 찾는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닌 시대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뒤지거나 포털사이트의 블로그나 카페를 검색하면, 상세한 여행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도 여행가이드북과 잡지가 있었고, 신문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1000년 전, 2000년 전에는 여행지 정보를 어디서 구했을까.

그 시절 여행을 권하고 이끈 건 시(詩)였다. 순서는 이렇다. 내로라하는 명승을 위대한 시인이 먼저 지나갔고, 그의 시에 감동한 후배 시인들이 찾아와서 다시 시를 남겼다. 이렇게 하나둘 시가 쌓이면 그곳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명승이 됐다.

인터넷도 신문이나 잡지도 없었던 까마득한 과거에 장강삼협으로 사람들을 처음 불러들인 이는 이백이었다. 그는 요즘 말로 ‘이 구역의 최고 인플루언서’였다. 장강삼협 명소마다 옛 시인들이 지은 수많은 시편이 걸려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시가 이백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이다.

“아침 일찍 오색구름 속에서 백제성을 이별하고 / 천 리 강릉 길을 하루 만에 돌아간다네 / 강 양쪽 기슭에선 원숭이 울음소리 끝없이 울리는데 / 내가 탄 가벼운 배는 벌써 첩첩산중을 벗어났구나.”

별스럽지 않은 시 같은데, 배경을 알고 보면 달라 보인다. 이백은 늘 세상에 나서고자 했으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해 좌절을 거듭했다. 어찌어찌 벼슬자리에 발을 들인 이백은, 황제 자리를 놓고 벌어진 형제간 권력투쟁 과정에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내란죄로 체포돼 유배 길에 올랐다.

환갑을 내다보는 나이에 내려진 유배형에 그는 절망했다. 유배지인 귀주로 가기 위해 장장 3개월을 장강삼협 거친 물살을 힘겹게 거슬러 올라와 백제성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뜻밖의 사면령 소식이 전해진다. 이 시는 이백이 절망의 문턱을 다 넘어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쓴 시다.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백제성은 ‘오색구름’ 속에 있고, 강릉 천 리 길을 ‘하루 만에’ 되돌아간다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건 생생한 희열과 기쁨이다.

이백이 쾌재를 부르며 되돌아간 지 8년이 지난 뒤 백제성에 두보가 온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가다가 병이 깊어져 머문 곳이 백제성이었던 것이다. 두보는 이곳에서 수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담은 시 ‘등고(登高)’가 단연 압권이다.

“…만리타향 늘 객이 되어 가을을 슬퍼하고 / 평생 병이 많아 홀로 누대에 오른다./ 간난에 시달려 희어진 머리 많아 슬퍼하는데 / 노쇠한 요즈음에는 탁주마저 그만두었어라.” 누구에게는 희열이었고, 누구에게는 쓸쓸함과 고통이었던 곳. 도가적 삶을 살아 시선(詩仙)이라 불린 이백, 유가적 삶을 살아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두보, 같은 곳을 노래한 두 시인의 시가 이리도 다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충칭에서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는 홍애동. 저녁이면 떠밀려갈 정도로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다.



# 저승과 지옥, 그리고 휘황한 도시

장강삼협 크루즈가 상수 코스의 종착지 충칭에 앞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풍도귀성’이다. 풍도귀성은 불교 사찰과 유교 사당, 도교 사원이 빽빽하게 계단처럼 들어서 있는 해발 288m의 명산(明山·밍산) 일대를 부르는 이름이다. 귀성(鬼城)이란 이름에서 짐작되듯 이곳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저승이 테마다. 전설 속의 저승 다리를 비롯, 저승문·18층 지옥 등이 있고 전각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저승판관이나 염라대왕을 비롯해 지옥에 빠져 형벌을 받는 장면 등이 재현돼 있다. 종교적 전통이 스며들어 있는 ‘저승 테마파크’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다.

명산은 도교에서 일컫는 ‘동천복지(洞天福地)’ 72곳 가운데 하나였다. 동천복지란 이상향 또는 낙원을 뜻한다. 한나라 때 이곳을 찾아든 음장생과 왕방평이란 이가 도를 닦았다는데, 이 둘의 성이 모으면 ‘음왕(陰王)’이 된다. 중국에서 음왕이란 곧 저승의 왕을 뜻한다. 이런 스토리 위에 명(明)·청(淸)대에 저승과 사후세계를 소재로 한 소설의 과장이 덧칠해지면서, 명산은 귀성, 그러니까 ‘귀신의 성’이 됐다.

장강삼협 크루즈의 상수코스의 종점이자, 하수코스의 출발지점은 휘황한 래플스시티충칭 빌딩 아래 조천문(朝天門·차오톈먼) 부두다. 남한 면적 80%의 크기에 인구가 3000만 명이 넘는 충칭은, 도시 하나만으로도 장강삼협 크루즈 전체 일정에 맞먹는 여행코스를 짤 수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호젓한 장강삼협 크루즈 여행에다 휘황한 고층건물로 가득한 충칭 도시여행까지 1석 2조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관광객들 사이에서 사진촬영지로 인기 높은 충칭의 이자파역. 열차가 건물을 관통한다.



충칭에서 먼저 가볼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처음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장장 8년에 걸쳐 유랑생활을 했다.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등을 전전하다 1940년 충칭에 뿌리를 내렸다. 충칭 안에서도 네댓 곳을 옮겨 다니다가 정착한 게 지금의 자리다. 1995년 8월 복원한 임시정부청사는 1층 내무부 집무실, 2층 재무부 집무실, 3층은 김구주석 판공실과 국무위원 회의실로 말끔하게 복원해놓았다.

장강 절벽 옆에 있던 군사요새를 개조해 상가단지로 꾸민 충칭의 야경 명소인 홍애동(洪崖洞·훙야둥)을 비롯해 명·청 시대 도자기를 굽던 마을을 도시재생사업으로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중국판 인사동’ 자기구(磁器口·츠치커우), 열차가 건물을 통과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리즈바역 등이 충칭을 대표하는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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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다 크루즈 운항기록

중국의 노동절 연휴였던 지난 1일부터 5일까지 장강삼협에서는 모두 98번의 크루즈 항해가 이뤄졌다. 전년 연휴 기간 대비 104.3%가 늘어난 사상 최대 운항횟수 기록이다. 이 기간에 크루즈를 탄 승객이 2만2000여 명에 달했다. 장강삼협 크루즈의 여전한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기록이다. 장강삼협을 운항하는 크루즈 중 가장 크고 호사스러운 배를 운항하는 회사가 ‘센추리크루즈’다. 올해 창업 30년을 맞은 회사로 직원이 20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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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 두루고 계란말이 한 대통령…기자들과 김치찌개 만찬
앞치마 두루고 계란말이 한 대통령…기자들과 김치찌개 만찬 취임 3년 차를 맞아 소통 강화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대통령의 저녁 초대’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만찬에서 대통령은 김치찌개를 직접 나눠줬다. 당선인 시절이던 2022년 3월 ‘취임 후 김치찌개를 끓여주겠다’고 기자들에게 했던 약속이 약 2년 2개월 만에 성사된 것이다.대통령실과 정치권 등에 따르면 이날 만찬 행사에는 출입 기자 200여 명과 대통령실 주요 참모진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참모진은 양복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하지 않은 차림으로 앞치마를 했다. 또 윤 대통령은 직접 한우와 돼지갈비 등 고기를 숯불 석쇠에 구워 기자들에게 배식했다.저녁 메뉴로는 안동 한우와 완도 전복, 장흥 버섯, 무안 양파, 강원도 감자, 제주 오겹살, 이천·당진 쌀밥, 남도 배추김치, 여수 돌산 갓김치, 문경 오미자화채, 경남 망개떡, 성주 참외, 고창 수박, 양구 멜론 등 전국 각지에서 공수된 국산 먹거리들이 나왔다. 술은 아예 제공되지 않았다.가장 관심을 받은 음식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였다.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 전인 2021년 9월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손수 만드는 요리 솜씨를 보여줬다. 대선 기간 당시에 윤 대통령 후보 유세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당선되면 TV에 나온 김치찌개를 맛보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새로운 청사에 초청해 김치찌개를 대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이어 2022년 3월 당선인 시절 통의동 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참모들과 김치찌개로 오찬을 함께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집무실 앞 천막 기자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치찌개 오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청사를 마련해 가면 한번 저녁에 양을 많이 끓여서 같이 먹자"고 재차 답한 바 있다.윤 대통령은 이날 인사말에서 "취임하면서부터 후보 시절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나온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2년이 지나도록 못 했다"며 "오늘 김치찌개 양이 많아 직접 만들진 못했지만 제 레시피를 운영관에게 적어줘서 그대로 만들었고 직접 배식하겠다"고 말했다.윤 대통령은 숯불 석쇠에 직접 구운 고기와 솥에 끓여져 나온 김치찌개를 기자들에게 나눠줬다. 이어 계란말이도 손수 만들었다.이날 기자단 초청 만찬은 취임 3년 차에 들어 언론계를 포함한 각계와 소통을 넓히려는 의미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4·10 총선 참패 이후 소통 강화를 다짐했고, 이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첫 회담, 취임 2주년 대국민 기자회견 등을 했다.윤 대통령은 보름 전인 지난 9일 회견에서 "저부터 바뀌겠다"며 "앞으로 언론과 소통을 더 자주 하고 언론을 통해 국민께 설명하고 이해시켜 드리겠다"고 말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마무리발언에서도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미리 자주 할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자주하겠다"고 했다. 만찬이 끝날 무렵에는 각 테이블을 돌며 참석자 전원과 인사했다. 여러 기자들이 이날과 같은 자리를 자주 마련하는 등 언론과 직접 소통을 확대해 달라고 하자 윤 대통령은 "또 만들겠다"고 답했다.이날 만찬에는 정진석 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장호진 국가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 김주현 민정수석, 전광삼 시민사회수석, 박춘섭 경제수석, 장상윤 사회수석, 박상욱 과학기술수석 등 주요 참모진이 자리했다.곽선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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