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2020년 서울월드컵경기장 부근에서 산책하다 쉬고 있는 누나 모습.

■ 그립습니다 - 누나 박묘순(1939∼2023)

누나는 올해로 꼬박 84년 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셨다. 농사꾼이셨던 아버지(고 박형호)와 어머니(고 이갑순) 슬하 8남매 중 맏이였다. 누나는 막내인 경순이와 나를 유난히 귀여워했다. 누나는 우리 형제자매 중에서도 유독 영특했지만, 동생들을 위해 학업을 접어야 했다. 농사를 짓느라 집에 있을 수 없던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먹이고 돌보느라 유년답지 못한 유년을 보냈다.

누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중매결혼을 하셨다. 식구를 덜어야 했다. 지독히도 가난하던 시절, 우리라고 달랐으랴. 시댁은 우리가 살던 대흥면 손지리와 그리 멀지 않은 신암면의 달성서씨 집안이었다. 그 집은 농사짓는 땅이 많아 그나마 우리보다 형편이 나았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테다. 누나는 7남매가 사는 그 집에서 맏며느리가 됐다.

누나가 시집가던 날, 나는 두고두고 울었다. 누난 엄마와 다를 바 없었기에 그 빈자리는 유난히 컸다. 내가 형들과 다퉜을 때도 누난 언제나 내 편이었다. 불현듯 내 곁을 떠난 것이 못내 야속하고 그리웠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하고 헛헛할 때마다 내 발걸음은 그저 신암면을 향했다. 불쑥 나타난 어린 동생을 본 누난 어떤 심정이었을까. 유교 전통이 지배하던 시골, 출가외인이던 누나는 시댁 어르신들 앞에서 얼마나 불편하고 민망했을까. 하지만 누나는 한 번도 내가 왔다고 손사래 친 적이 없었다. 늘 웃어주고, 안아주고, 배불리 먹여 집에 보내줬다.

매형은 45세에 세상을 등지셨다. 붕성지통(崩城之痛·남편을 여읜 여성의 슬픔)이라던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텐데, 누나는 끝내 좌절하지 않았다. 시골을 떠나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터 잡은 누나는 생선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셨다. 슬하 3남매를 키우고 매형의 6남매 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매형의 동생들은 결혼해서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누나에게 의지했다. 여성의 몸으로 일가를 챙기며 묵묵히 주어진 일을 다 해냈다.

조카들은 모두가 훌륭하게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큰 조카는 모범 개인택시 기사였다. 유난히 공부를 잘했던 둘째 조카는 고전번역원에서 승정원일기 등 역사 문헌을 번역하는 일을 하며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막내 조카는 어여쁜 며느리와 슬하에 올해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 재호(8)를 키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누나는 재호가 6살이 될 때까지 육아를 도왔다고 한다. 손주를 품에 안은 누나를 상상하니 철없던 유년의 나를 돌보던 어린 누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엄마로서, 가장으로서 주어진 모든 인생 숙제를 마치고 건강을 잃은 누나는 말년에 한동안 자녀와 손주들의 돌봄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지난 4일 오전 5시, 조카가 전해온 부고는 지금도 나를 슬프게 한다. 올해로 불혹에 접어든 아들 둘을 데리고 조문을 다녀왔다. 누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던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생전에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장지는 연세대병원 시신 안치실이었다. 아직도 시신 매장을 중시하는 유교 관습이 남은 사회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학은 누나로 인해 한 걸음 더 발전해나갈 것이다.

빈소에는 가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모여 누나의 은덕이 어린 추억담을 나눴다. 누나는 주어진 삶을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한평생 친정과 시댁 식구를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먼 훗날, 천국에서 누나를 만난다면 생전 못다 한 질문을 하고 싶다. “어릴 적 자주 찾아오던 동생 때문에 힘들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고백하련다. “고마웠고, 미안했고, 사랑한다”고. 누나가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고단했던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 품에서 편안히 쉬시길 오늘도 기도한다. 입가엔 누나가 즐기어 불렀던 찬송가 후렴구만 맴돈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동생 박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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