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아닌 변방의 잡초에서 혁신 나와… 기초연구 투자 확 늘려야”

이미지 크게보기 최재천(왼쪽)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한국기술센터 8층에 위치한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OSP)에서 진행된 ‘혁신거장과의 대화’에서 장웅성 OSP 단장과 대담을 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 혁신거장과의 대화 - ③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끝>

연구주류성 보여주는 벤치마킹
독창성없는 학계현황 보고일뿐
정부 예산, 기초분야 분배 시급

‘병정 진딧물’ 발견한 일본 교수
국가의 지속적 지원 정책 덕분
기존과 차별화된 연구 결과 내

국내 적자생존 경쟁방식 탈피
타 분야 연구진 간 교류 늘려
‘R&D 효자’ 융합기술 개발해야

정리=박정민 기자 bohe00@munhwa.com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생물학자로 일반인들에겐 ‘개미 박사’로 유명하다. 산업 분야에서 ‘혁신’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학문 간의 통섭·융합’은 현시점에서 산업·경제 혁신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 덕목이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예산 삭감 등 여러 논란 속에서 최 석좌교수가 강조하는 ‘혁신을 위한 조건’은 무엇이며, 기초과학 분야 연구에 대한 국내 현실은 어떨까. 최 석좌교수는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한국기술센터 8층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OSP)에서 진행된 장웅성 OSP 단장과의 대담에서 “한국에서는 기초연구 투자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면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한 ‘에볼루션(evolution·진화)’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최 석좌교수는 “한국에서도 최근 주류가 아닌 변방에서 열심히 해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잡초가 효자 노릇을 하는 것인데, 이 같은 변방의 인물들도 포용할 수 있는 두꺼운 층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웅성 OSP 단장(장 단장) : 패스트 팔로어 시대의 혁신의 전략·방법들은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 퍼스트 무버로서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선 혁신도 변화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기술이나 과학의 관점에서 혁신을 언급하는데, 교수님은 생태 등을 포함한 더 넓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전환의 시대에서 혁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으면 한다.

△최재천 석좌교수(최 교수) : 어느 중국 철학자가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레볼루션(revolution·혁명)은 없다’고 했다. ‘에볼루션’이다. 우리가 혁신을 말하며 큰 기대를 하지만, 하루아침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매일 적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생긴다. 정부 주도로 갑작스러운 혁신이 일어날 것처럼 얘기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다. 내년 2월 퇴직을 앞두고 과학자로서 내 삶을 회고해 보니, 한마디로 연구비가 없어 힘들었다. 일례로 R&D 지원을 하는 한국연구재단에 계셨던 어떤 분이 과거 내 연구비 신청 심사 때 있었는데, 당시 내가 발표한 연구가 사례가 없고 시급하지도 않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됐다더라. 그때 다른 신청자는 해외 사례 등을 제시하며 심사에 응했다. 우리는 연구비를 신청할 때 이른바 ‘벤치마킹’을 한다. 다른 해외 사례 등도 제시하는데, 그게 심사자들에겐 안심 요소이자, 실패 확률을 낮추는 기제다. 난 그걸 대대적으로 손봤으면 한다. 벤치마킹을 하는 이유는 내 연구가 얼마나 독창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 학계 현황보고에 불과하다. ‘내 연구는 주류 연구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벤치마킹은 ‘내 연구가 독특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밝힐 수 있는 것이 돼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연구에 대해 정부 지원이 집중돼야 한다. 지금 정부의 R&D 예산은 규모도 크지 않은데, 삭감이 된 모양새다.

△장 단장 : 두 가지 관점을 보여준 것 같다. 첫째, 전환기에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방하고 따라가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혁신 방식이 변화한다면 R&D 분야에서 암세포와 같은 문제점을 먼저 파악하고 진행되면 나았을 텐데 너무 대책 없이 지원 예산을 자른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혁신의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게 우리의 숙명이고,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 앞으로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든 대한민국은 혁신 파트너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번 R&D 삭감은 그들에게 한국이 그런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 : 지금 국회에서 삭감된 R&D 증액을 재논의하고 있는데, 그나마 (지원이) 급한 부분부터 할 것이다. 과거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서울대에서 제안을 받고 들어왔는데, 그때 비행기를 탈 때 갖고 온 1993년 ‘네이처’지 기사가 있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에 동이 텄다’라는 제목의 열 페이지가 넘는 기획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면서 기대감을 가졌다. 기사 제일 마지막 부분에 해외 석학들이 한국에 제언하는 내용이 있었다. 한국에도 삼성, LG 등 대기업이 있는데, 국민의 세금으로 걷은 연구비는 기초과학에 투자하고 응용과학은 이 같은 대기업의 지원으로 가야 한다고 제언해 놨더라. 이걸 보고 한국 가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고 기대가 컸다. 한국에 와서 나 역시 이런 내용을 칼럼에 많이 썼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초연구에 투자하는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혁신은 어떻게 보면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이번에 일이 이렇게 터졌지만 이를 계기로 삼는다면 급한 분야 땜질이 아니라 한번 대토론을 거쳐 도대체 우리 정부가 감당할 수준의 연구비는 어느 정도이고, 그리고 이걸로 어떻게 국가 R&D로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장 단장 : 정부의 문제의식도 교수님 말씀과 맥이 닿아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너무 나눠먹기식 아니냐는 것이다. 국가 R&D는 진짜 R&D에 써야 하는데, R&D 아닌 곳에 쓰이고 있다. 기초연구는 국가의 미션이다. 민간이 하기 싫어하고, 할 수 없는 영역들, R&D나 혁신 정책이 바뀌어야 할 부분을 최 교수가 말했는데, 우리는 성장 과정이 너무 효율 중심이었다. 원천적인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엔 너무 참을성도 없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대 방향이어야 한다. 그동안 배타적이었다면 이제는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벤치마킹에 의존했다면 실패의 가능성이 훨씬 큰 도전들을 과학자들이 시도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최 교수 : 분배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정부 예산은 기초과학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노벨상 시즌만 되면 개탄하는데, 노벨상 자체는 독특함이 있다. 노벨상은 현시점의 특정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상을 줄 분야를 먼저 정하고, 그 처음이 누구인지를 찾아 그 공로에 대해 수여한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오타쿠적인’ 연구자가 많이 받는 편이다. 노벨 생의학상(2015년)을 받은 중국의 투유유(屠유유) 박사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똥쑥에서 발견해 받았다. 그 사람은 인터뷰에서 평생 중국 정부가 충분한 연구비를 줬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도 동일하다. 노벨상 수상 연구자가 많이 받은 것도 아니다.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줬다. 연구비 지원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특별한 성과 없이 똑같은 연구를 계속하면 잘린다. 우리는 또 달라고 하면 특혜받는 줄 안다.

△장 단장 : 지속·예측 가능한 R&D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R&D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는 우리가 이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제협력 등 지평을 넓혀 가자는 것인데, 학문과 학문, 기업과 기업 간에 우리는 그간 지나치게 적자생존 경쟁 방식이었다. 배타적·독점적으로 갖고 가는 방식에 익숙했다. 정부는 예산을 주는 입장에서 해당 분야 성과가 저변으로 확대·확산되길 원하는데, 우린 너무 협력하지 않아 투자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었다. 요즘은 산업 경계도 허물어지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최 교수 연구처럼 개미보다 못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웃음). 마치 개미가 좋은 집을 짓고 창의적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 제공을 하는 식이 돼야 한다.

△최 교수 : 요즘 우리 사회에서 소위 뜨는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방시혁·임윤찬 같은 인물들, 이들은 주류가 아닌 변방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결국은 잡초가 효자 노릇을 할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고 집중한 것에도 어떤 것이 ‘터질’ 수도 있겠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해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변방의 인물들도 포용할 수 있는 두꺼운 층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명한 생물학자 중 일본의 시게유키 아오키 교수는 진딧물에서 ‘병정 진딧물’을 발견했다. 30여 년을 진딧물만 연구한 사람이다. 진딧물 중에 등딱지가 딱딱한 놈이 있는데, 이놈이 위험해지면 동료들을 지키는 행위를 한다는 논문을 썼다. 진딧물 같은 곤충도 포유류처럼 고도의 사회 성향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람의 연구도 일본 정부가 지원했다. 투유유처럼 지속적인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큰일이 터지는 것이다.

△장 단장 : 주류 연구도 역할이 있겠지만, 그런 틈새나 변방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에 동의한다. 아오키 교수 사례는 우리에게 좋은 영감을 줄 것 같다. 일본은 산업 쪽도 ‘니치 엔터프라이즈’ 전략을 쓰고 있다. 정말 틈새에서 남들과 차별화하며 1등 할 수 있는 것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이 있다. 우리도 이런 방식에 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통섭·융합을 많이 강조했는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더라. 실질적으로 혁신은 다른 분야들을 그냥 섞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융합이든 통섭이든 제대로 된 의미를 한번 정의해 달라.

△최 교수 : 글쎄,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을까? 한자 융(融)에서 보듯, 융합은 전혀 다른 새로운 성질이 나오는 것이다. 나노 분야 연구자와 바이오 분야 연구자가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고 ‘나노·바이오’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통섭적 융합을 해야 한다. 통섭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서로가 자주 만나고 각자 분야를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인지과학을 예로 많이 드는데, 뇌과학자, 기계공학자, 심리학자 등이 모이고 이들이 서로를 공부하다 보니 인지과학이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잡종을 만들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그 과정이 소중한 것이다. 결과가 없더라도 학자들이 모일 기회를 자꾸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남의 집에 가서 내 뜰을 보면 달라 보인다. 지금의 공부 방식으론 다른 분야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 이들도 연구비를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장 단장 : 오늘 과학뉴스 중 캘리포니아공과대(캘텍)의 젊은 여성 과학자가 기존 인공지능(AI)이 1년 걸리던 기후 예측 작업을 단 한 시간 만에 할 수 있는 새로운 AI를 개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캘텍이란 대학은 다학제 전문가들이 모인 곳인데, 이곳에서 만든 결과물이다. 향후 우리가 정말 새로운 방향을 정한다면, 그 같은 통섭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 젊은 인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최 교수 : 난 이미 그런 학자를 많이 봤다. 이들은 겁이 없다. 우리 땐 자기가 할 줄 아는 것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다. 요즘 청년 학자들은 거침없더라. 요즘 학자들은 계속 뭘 배우러 다닌다고 한다. 가끔 일각에선 못마땅해하지만, 그 세대가 맘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 해외 연구자들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세계적 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눈앞의 현실에만 안주하지 말고. 우리 젊은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고, 세계적 학자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도록 정부와 사회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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