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 권호영 기자

■ 화평·화관법에 등골휘는 기업

사고위험 무관 획일 기준 적용
수십년 취급 물질 ‘유독’ 지정
전체시설 보수에 눈덩이 비용
기준 미달땐 매출 5% 과징금

EU보다 규제 강도 훨씬 강해
대다수가 중기… 경영에 부담

조선업체인 C사는 수십 년간 취급하던 화학물질이 갑자기 유독물질로 지정되면서 수백억 원대의 시설 설치 비용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야외에서 이 물질이 포함된 도료로 스프레이 작업을 하려면 인체·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업장 전체 시설을 보수해야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생기면서 경쟁국인 중국과 비교해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란 걱정이 크다. C사 관계자는 “사고 위험성과 무관하게 획일적인 취급·시설기준을 적용받다 보니 개선·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000만~3000만 원에서 2억~3억 원의 비용, 여기에 최장 1~2년 시간을 들여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에 따른 화학물질 등록을 마친다 해도 기업의 부담은 끝난 게 아니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화평법이 화학물질 등록·신고와 심사·평가에 관한 법이라면, 화관법은 화평법에 따라 지정된 유해화학물질 취급관리 기준을 규정하고 있다. 기업들은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 착공 전 사고예방계획서 작성에 2000만~3000만 원, 취급시설 설치검사 준비를 위한 컨설팅에 1000만~5000만 원, 시설개선에 수백만~수십억 원을 쏟아부어야 하고 이후 설치검사 기관에 검사 수수료도 내야 한다. 여기에 413개 안전기준 미충족 시 사업장 매출의 최대 5%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기업들 사이에서는 ‘예방이 아닌 처벌을 위한 법’이란 푸념이 나온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도입된 우리나라 화학물질 규제는 유럽연합(EU)의 ‘신화학물질 관리제도(REACH)’를 참조했지만,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 등을 비롯해 오히려 강도가 세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전관리 수준도 훨씬 엄격하다. EU는 등록·평가된 물질과 관리대상 물질을 분리, 사고 발생 및 피해 가능성이 높은 물질 위주로 관리대상 물질을 별도 선정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등록·평가된 화학물질을 관리제도로 그대로 연계해 일률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올해 기준 유독물질은 1109종으로, 화평법 시행 전 17년간 249종 증가하던 것이 화평법 시행 후 9년 만에 386종이 늘었다. 현 체계 유지 시 유독물질이 3000여 종 이상으로 폭증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게다가 대다수가 영세한 규모여서 경영에도 상당한 부담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화학물질 등록 업체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이 EU는 31%인 반면, 우리나라는 68%나 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유해성·위해성에 따라 유독물질을 만성·급성·생태로 나눠 차등 관리한다고는 하지만 유독물질로 지정되면 화관법 대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지금 제도하에서는 유독물질 수 자체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어 부담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복규제도 문제다. 화학물질 하나를 제조하려면 화평법상 등록→화관법상 확인명세서 제출→산업안전보건법상 물질안전보건자료 신고가 필요하다. 김성훈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국가청정생산지원센터 선임연구원은 “화평법상 등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업의 애로로 작용하고 있는 데다 화평법에서 화관법으로 이어지는 규제, 부처별로 중복되는 법안 등이 행정 업무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 용어설명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 화학물질의 등록·신고 및 유해성·위해성에 관한 심사·평가, 유해화학물질 지정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 신규는 연간 0.1t 이상, 기존은 1t 이상 화학물질의 유해성 정보를 환경부에 등록해야 하고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 유독물질, 허가제한 금지물질, 사고대비물질 등 유해화학물질 취급현장 관리기준을 구체화하고 화학물질 사고 시 행정처분을 구체화한 법. 안전기준 413개를 충족해야 하며,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낼 경우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대 5%에 달하는 과징금을 내야 한다.


박수진 기자 sujininva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