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속 미술-3. ‘종이의 집’ 유관순과 100원짜리 충무공, 500환 이승만 스토리
“유관순 열사가 어떤 인물이고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지를 세계에 조금이라도 알리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지 크게보기10만원 권 종이지폐 이미지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에 등장한 10만 원권 지폐 도안. 윤여환 화백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에 출연한 이원종 배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극 중 남북이 모두 동의한 통일화폐 10만 원권 도안 인물로 유관순 열사가 새겨진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드라마 제작진은 5만 원권 인물은 안중근 의사, 1만 원권은 안창호 선생으로 상정했습니다. 긴박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조폐국 벽면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세 분의 초상이 함께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유 열사의 영정은 자주 보이는데요, 극의 전개상 조폐국 윤전기에서 10만 원권 지폐를 찍어내는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크게보기윤여환 작 유관순열사 국가표준영정 제 78호 윤여환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지폐 도안에 들어간 유 열사의 영정은 윤여환(69) 화백이 그린 것입니다. 충남대 예술대 학장을 지낸 윤 화백은 한국화의 대가로 가톨릭 성화(聖畵)에서 일가를 이룬 분입니다. 정부 요청을 받아 국가표준영정을 다수 제작했는데, 유 열사의 영정은 지난 2007년 완성했습니다. 그 이전엔 고 장우성 화백이 유 열사의 옥중 사진을 참고해 그렸던 그림이 표준영정이었습니다. 유 열사의 얼굴이 고문으로 인해 너무 부은 모습인데다가 중년여성처럼 나이 들어 보인다는 여론에 따라 정부에서 새 영정을 윤 화백에게 위촉한 것이지요. 장 화백의 친일 논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윤 화백은 새 영정을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 3.1 만세운동을 벌이기 직전 태극기를 쥐고 이화학당 교실에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의기를 표정으로 살렸습니다. 당시 열사께서 직접 그리신 태극기 모양대로 영정에 표현했는데, 1948년 제정된 표준 태극기와 다르니 ‘열사께서 우리 국기도 제대로 못 그리겠냐’라는 지적이 있어서 고쳐야 했습니다. 드라마 속 지폐에 윤 열사의 상반신과 태극기가 반영됐지요.”
윤 화백은 극 중에서처럼 실제로 통일 대한민국 지폐에 유관순 열사 영정이 선정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런 소망을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우리 지폐 인물로 거론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10만 원권과 5만 원권 등 고액권 발행 계획을 발표했던 2007년입니다. 한은 자문위원회는 당시 여론조사 대상 후보 인물로 20명을 추천했고, 여론조사 결과와 각종 자료를 검토한 후 2차 후보 10명을 발표했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론 조사 결과에서 상위권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유 열사는 최종 후보 4인에서 빠졌고, 한은은 그해 11월에 김구와 신사임당을 각각 10만 원권과 5만 원권 초상 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단체에서 김구 선생 초상을 넣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좌우 진영 모두 지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10만 원권이 나오면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뇌물로 인한 부정부패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발행 계획 자체가 취소됐습니다.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가부장제에 순응한 인물이었다는 이유로 일부 여성운동단체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로 여성 인물이 화폐 도안에 오르려고 하는데, 여성단체가 막아서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신사임당은 결국 5만 원권 지폐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신사임당이 가부장제에 순응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이 우세했던 것이지요. 그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서화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우뚝 세운 인물을 자녀 양육에 힘썼다는 이유로 반여성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치니까요.
그런데 찜찜한 것은 유 열사가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시 정부가 한·일 관계의 경색을 우려해서 유 열사를 탈락시켰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요. 당국이 명확히 확인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갖가지 설이 나돌고 있습니다. 뜻있는 이들은 “우리나라 지폐에 단 한 분의 독립운동가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라며 울분을 터트립니다.
◇“세계 최초로 모자(母子)가 화폐 인물”
현재 우리나라 지폐는 총 4종(1,000원, 5,000원, 10,000원, 50,000원권)입니다. 그것들의 인물 초상과 그림 이미지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선 1000원 권(136×68mm)은 퇴계 이황 선생을 앞면에 모셨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글을 익힌 명륜당을 배경으로 퇴계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매화나무를 이미지화했지요. 뒷면은 선생이 기거했던 도산서원의 주변 산수를 담은 겸재 정선의 그림 ‘계상정거도’를 담았습니다
5000원 권(142×68mm)의 주인공은 율곡 이이가 차지했습니다. 앞면에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과 오죽을 넣었고, 뒷면에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8폭 병풍 초충도병(草蟲圖屛)에 있는 그림을 이미지화했습니다.
1만원 권(148×68mm)의 인물은 세종대왕입니다. 앞면에 한국의 5대 명산과 해, 달, 소나무를 그린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뒷면 소재로는 세종대왕 시절에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던 혼천의(渾天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와 함께 국내 최대 천체망원경(구경 1.8m)의 이미지를 넣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5만 원권(154×68mm)은 신사임당이 주인공인데요, 앞면에는 사임당이 그린 묵포도도(墨葡萄圖)와 초충도병의 가지 그림을 배치했습니다. 뒷면은 월매도와 풍죽도를 디자인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사임당의 초충도 이미지가 지폐 5000 원권과 5만 원권에 함께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강릉 오죽헌에 가보신 분은 보셨겠지만, 그 입구에는 세계 최초로 모자(母子)가 지폐 인물이 되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신사임당과 이율곡 선생이 우리 역사를 빛낸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지폐 4종 중 2종의 주인공을 모자가 차지한다는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이미지 크게보기100원 짜리 동전
어떤 분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폐가 아닌 동전의 인물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100원 짜리 동전의 앞면에 충무공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백원’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지요. 뒷면에는 100원을 뜻하는 아라비아 숫자 ‘100’과 제조연도, ‘한국은행’이라는 표기가 있습니다.
충무공이 처음 화폐에 등장한 것은 1958년 발행된 50환 짜리 지폐 뒷면이었습니다. 동상 형태의 이미지가 담겼지요. 1962년 화폐개혁 때 이 지폐가 사라졌고, 충무공은 1970년에 100원 짜리 동전으로 재등장합니다. 1973년엔 500 원 지폐의 초상 인물이 됩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텐데요, 이 지폐의 앞면에는 충무공의 초상과 거북선이, 뒷면엔 현충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학(鶴)을 새긴 500원 짜리 동전이 나오면서 충무공의 초상이 지폐에서 사라지고, 지금처럼 동전에만 남아 있습니다.
화폐의 금액이 인물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5만 원권의 신사임당이 100원 짜리 이순신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접하는 동전에 모셔진 인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100원짜리가 유통이 예전처럼 이뤄지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 변화에 따라 화폐 인물에 대한 논의가 다시 있어야 할 듯 싶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화폐에 등장한 인물로 위에 언급한 분들 이외에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남의 초상은 1950년 첫 지폐에 등장한 이후 1962년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12년간 10종의 지폐와 주화의 도안 인물을 독식했습니다. 우리나라 지폐의 인물 초상이 오른쪽에 배치되게 된 것이 이승만 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네요. 1956년 나온 500환 권의 한 가운데 자리한 우남의 초상이 지폐가 접힐 때 일그러진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한국은행이 이듬해에 황급히 초상의 위치를 오른쪽으로 바꾼 새 지폐를 내놨습니다. 인물초상은 1973년 1만 원권과 500 원권에서 한때 왼쪽에 위치했지만 결국 오른쪽으로 고정됐습니다. 우리나라에 오른손잡이가 많아 초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것이 식별하기 좋다는 의견 때문이라네요.
이승만 시대의 화폐 이야기를 되돌아보면 씁쓸합니다. 우남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초석을 놓은 위인이지만, 그의 권력을 빙자해 호가호위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독재를 했다는 흔적이 거기에도 있는 탓입니다.
화폐 인물 그림을 살피면서 새삼 아쉬운 것은 친일 논란입니다. 동전과 지폐에 들어간 인물화가 친일 화가의 작품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표준 영정이 고 김은호 화백 그림에서 이종상 화백의 작품으로 바뀐 것은 그런 논란 때문입니다. 친일 논란에 대한 시각은 역사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며 당시를 살았던 인물들의 삶을 오늘의 관점에서 일도양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독립운동가들이 한 분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떠나 모두가 인정하는 유관순, 안중근, 안창호 등이 지폐 인물이 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장재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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