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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안병욱 (1920∼2013)

1970년대, 누구에게나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종로2가에는 양우당 서점과 종로서적이 있었지요. 이 두 곳은 서울 당대 최고의 서점으로 지식의 산파 역할을 하고 있었지요. 서점은 다방처럼 비싼 차를 마시지 않아도, 또 책을 사지 않아도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지요.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안병욱 교수님 저서를 본 순간, 혈 자리를 감지한 명의의 손끝처럼 잔잔한 떨림이 일었습니다. 그 떨림이 뇌파의 전율로 바뀌어 단숨에 반을 읽고 다음 날 나머지 반을 읽었던 그 감동과 환희의 메시아는 정가 1000원짜리 ‘희망의 철학’이었습니다. 그 후 서점에 진열된 교수님 책은 모두 독파하며 한동안 교수님에 대해 가슴앓이를 했지요. 그로부터 얼마 후 신간 ‘안병욱 인생론’을 걸어가며 읽다가 점심을 머리에 이고 배달하는 아주머니와 부딪혀 밥상이 길바닥으로 엎어지는 바람에 책값보다 비싼 밥값을 물어주는 순간에도 김치 국물이 튄 책갈피를 먼저 닦았지요. 당시 하숙집 주인이 안병욱 씨가 누군데 학생은 이분을 그리 좋아하느냐 묻기에 이분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유명한 분이라고 말하자 “어머, 그럼 이분은 앙(안)크라테스네” 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해, 젊은이들은 여름이면 청평 강변가요제에 모여 함성을 질렀고, 명동 무교동의 라이브 음악 감상실은 청바지에 통기타 음악이 한 시대를 풍미했지요. 그중 쎄시봉이 청년문화의 메카로 불리던 시절, 저는 풍경소리 낭랑한 산사 골방에서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지막엔 러셀까지 서양철학 거장들의 머리를 들추어 지식을 탐닉하던 그 즐거움은 저에겐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의 쎄시봉이요, 강변가요제였습니다. 그때 밤눈 비비며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키르케고르의 난해한 실존철학을 더듬거리던 시간들, 고통이었지만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가지고 있는 교수님의 수많은 저서는 저의 정신적 재산이요, 큰 등불입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함자에서 빛날 ‘욱’을 빌려 저의 두 아들 김영욱, 김민욱 이름을 지었으며 손주 이름도 교수님 성을 빌려 김지안으로 작명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이지요. 제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교수님의 영혼은 저의 두 아들과 손주 이름에 남아 샛별처럼 반짝일 것입니다. 두 아들도 아버지의 스타는 안병욱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철학 정신을 이어받은 자신들 역시 교수님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내 서재에 있는 교수님의 저서를 관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아, 이 책들이 젊은 날 아버지의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끈기와 집념의 철학을 깨우쳐 준 보물이군요. 한 권의 책이 백 명의 스승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며 약속을 했습니다.

요즘도 교수님이 그리울 때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해 누렇게 바랜 책들을 뒤적입니다. ‘지혜롭게 사는 길’ ‘현대사상’ ‘도산사상’ ‘빠스깔사상’ ‘키에르케고르사상’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아름다운 창조’ ‘진리의 샘터에서’ ‘고뇌를 넘어서 환희로’ ‘내일 지상에 종말이 올지라도’ 등등 30여 권의 책이 빙그레 웃습니다. 그동안 이사 다니며 교수님 책은 항상 상좌에 실었지만 그래도 몇 권의 책은 눈에 보이지 않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연예인을 스타라고 부르지만 교수님은 저의 연예인이요, 스타입니다. 교수님은 1872년에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을 마이 스타라고 부르시며 1963년 영국을 직접 방문하여 근사하게 파이프를 문 91세 백발의 노철학자 러셀을 만나 거대 철학 담론을 나누신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아름다운 창조’에서 회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 선생의 권유로 흥사단에 입단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상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철학을 젊은이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도 흥사단이 있는 혜화동을 지날 때면 교수님 생각을 합니다. 올여름에는 교수님의 유품이 전시된 양구 인문학박물관으로 두 아들과 손주를 데리고 꼭 찾아뵙겠습니다. 마이 스타 안병욱 교수님!

시인 김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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