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고 정주영(왼쪽) 현대 명예회장이 1983년 현대중공업 생산현장을 방문, 선박 프로펠러 위에서 작업 중인 직원과 대화하고 있다. 울산박물관 제공

(中) ‘불가능을 가능으로’ 뚝심경영

- 1965년 태국 고속도로
적자 났지만 “기죽지 말라”
기술 축적해 5차례 더 수주

- 1968년 경부고속도로
‘무리한 공사’의견에 “가능”
工期까지 단축… 기적 이뤄

- 1977년 사우디 주베일항
400t 철구조물 조달 어렵자
울산서 제작해 바닷길 운반

땅길과 물길을 열고, 잇는 기술인 토목(土木)은 ‘문명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불린다. 고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창의적 발상으로 주위에서 불가능하다고 했던 토목 사업들을 가능하게 하며 한국의 경제발전과 기업의 성장을 동시에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아산 정주영 레거시’ 저자인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현대가 성장하던 때는 한국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였다”면서 “아산은 기업인으로서 영리 목적의 사업을 영위했지만, 기업을 국가관에 접목시켜 경영했다”고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역발상이 건설 역사에 남긴 유산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굵직하게 남아 있다.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기였던 1970년대에 경제의 대혈맥(大血脈) 역할을 했던 고속국도 1호선, 즉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 명예회장의 뚝심과 기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공사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예산 등 문제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무리한 공사라는 부정적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현대건설이 ‘1㎞당 1억 원 미만의 비용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가능하다’고 나서면서,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役事)로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1968년 2월에 시작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현대건설을 비롯해 총 16개의 국내 건설업체와 3개 육군공병단이 투입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조강 시멘트 사용 결단으로 공기를 단축한 경부고속도로 당재터널. 현대건설 제공

현대건설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은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현대를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정 명예회장은 매일 전국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사명감을 심어주고 공사를 독려했다고 한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7개 공구 중 시공 기간이 가장 길고, 공사비도 가장 많이 들었던 대전공구 당재터널은 정 명예회장의 결단력이 돋보였던 공사로 평가된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당시 해당 지역의 토질이 좋지 않아 터널 공사에 애를 먹었는데, 공기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은 조강(早强) 시멘트 사용뿐이었다”며 “정 명예회장이 단양 시멘트공장 라인을 중단시키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강 시멘트를 생산하도록 해 공사를 제때 마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강 시멘트는 일반 시멘트에 비해 입자가 곱기 때문에 양생 속도가 빨라 공사를 신속히 진행할 수 있다.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국내 유일하게 해외 고속도로를 건설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1965년 수주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국내 건설업체가 해외에 진출한 첫 사례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규격에 맞춘 최초의 고속도로 공사였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이 공사로 당시에는 적지 않은 약 2억8800만 원의 적자를 봤다. 현대건설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은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지만 귀국길에 오른 임직원들을 일일이 다독이며 “이 정도 일로 기죽지 말게. 새로운 도전에는 항상 수업료가 필요한 법이니까”라고 말했다. 이후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5번의 고속도로 공사를 더 맡았고, 이는 고속도로 공사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해상 구조물을 1만2000㎞ 바닷길로 수송해 만들어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현대건설 제공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에 산업항을 건설한 것도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7년 1월 시작된 이 공사에서는 3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 건설이 가장 중요했다. 현대건설은 여기에 필요한 철구조물(재킷)의 해외 조달이 어렵자, 각각 약 400t에 달하는 철구조물 89개 전량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1만2000㎞에 달하는 바닷길을 통해 대형 바지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항만까지 운반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결국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외국 엔지니어들은 그 결과물에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소양강댐 건설에서도 빛을 발했다. 1967년 소양강댐은 설계를 맡은 일본공영의 계획에 따라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자재조달이 어려운 시멘트보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자갈과 모래를 이용한 사력(砂礫)댐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정부가 정 명예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결국 소양강댐 건설비용을 약 30% 줄일 수 있었다. 미군의 요청으로 한겨울 유엔군 묘지에 잔디 대신 보리싹을 옮겨 심은 일화도 정 명예회장의 창의적인 발상을 보여주는 예시다. 김 교수는 “정 명예회장은 열정이 있는 리더였고, 그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경영관은 디지털 시대인 지금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민 기자 ja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