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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헤리치 & 임동혁

인문과학, 자연과학계를 걸쳐 ‘인류세’ 논의가 한창이다. 인류세란 인류가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새롭게 탄생한 시대를 일컫는다. 코끼리가 무분별한 밀렵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상아가 없는 종으로 자가 진화하는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비인간, 사물과의 공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벳푸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 인 서울’은 하이든 현악 4중주 ‘종달새’로 시작해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그리고 라흐마니노프가 인간 죽음의 감정을 묘사한 ‘교향적 춤곡’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으로 펼쳐졌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9년 만에 내한해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호흡을 맞췄다. 프로그램 기획의 의도를 인류세 담론으로 이해해본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생상스가 열네 개의 짧은 악곡에 동물들을 장난스럽게 기록하던 133년 전 만큼 동물들은 평화롭지 않다. 이날 아니 뒤투아가 낭독한 프랑스 작가 프랑시스 블랑슈의 텍스트는 ‘짐승들이 가장 짐승 같은 것은 아니니, 이것이 의심스럽거든 인간의 사육제로 오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아르헤리치와 임동혁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를 뒤흔들던 죽음의 공포를 향해 냉정하게, 또 뜨겁게 내달렸다. 클래식은 이렇게 현대의 풍경과 만나 늘 낯선 순간을 선사한다.

정작 이날 공연장의 분위기는 축제 그 자체였다. 임가진·김덕우(바이올린), 강윤지(비올라), 심준호(첼로)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를 연주하며 무대 위에 봄 내음을 불러왔다. 특히 저음부 악기 연주자들의 호연으로 차분하고 따스한 감흥이 느껴졌다.

‘동물의 사육제’ 연주를 위해 아르헤리치와 임동혁은 객석을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내레이터인 뒤투아와 현·관·타악기 연주자들이 빙 둘러앉고, 프랑스어로 낭독되는 텍스트의 번역이 스크린에 비쳐졌다. 아르헤리치의 딸이자 연극배우·연출로도 활동한 바 있는 뒤투아의 능청스러운 표현력은 연주에 생동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타악기 주자 스콧 버다인이 닭의 울음을 실감나게 흉내 내다 알까지 낳은 두 번째 악곡, 연주자들이 거북을 묘사하다 다 함께 잠들어버린 네 번째 악곡에서는 객석 전체에서 폭소가 터졌다. 지루한 연습을 종일 반복하는 피아니스트를 풍자한 열한 번째 악곡에서 뒤투아가 아르헤리치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놀려대자 임동혁마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비형식적인 짧은 악곡들에서도 아르헤리치는 특유의 날카롭고 생기 넘치는 질감들을 보여주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아르헤리치와 임동혁이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교향적 춤곡’. 같은 악기 두 대의 편성이지만 두 연주자의 접근, 전개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임동혁이 공격적인 음표들을 뜨겁게 노래하며 나아가는 동안 아르헤리치는 어두운 심연으로 파고들었다. 2악장의 왈츠, 그리고 3악장 죽음의 종소리까지 두 사람은 직관적으로 묻고 답하는 대신 에너지를 응축하며 끝없이 뒤섞였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두 학자가 한편의 완벽한 논문을 써내듯, 두 사람은 수준 높은 조화를 이루었다. 특정 정서를 자아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여전히 예민하며 생동감이 넘쳤다. 시종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넉넉한 태도도 엿볼 수 있었다.

동물은 연극 속에 갇히고, 인간은 구원을 기다린다. 결말은 비극일까. 두 사람은 위로라도 하듯 모차르트의 K. 448 3악장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이들의 ‘교향적 춤곡’은 워너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지난 2일 발매한 음반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 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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