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제142호 동묘의 전경. 사대(事大)의 상징이었던 동묘 앞에 지금은 구제시장이 자리 잡은 모습은 김수영의 시 ‘묘정의 노래’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듯하다. 신창섭 기자 bluesky@

(29) 김수영 시 ‘묘정의 노래’ 배경… 서울 종로구 동묘

지하철 동묘역에서 동묘로 가는 길은 판타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몽상의 입구다. 판타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머뭇거림’이 있어야 한다. 동묘로 가는 길목에는 시큼한 머뭇거림이 웅성거린다. 뭔가 찾는 듯한 노인들, 소주병과 함께 뒹굴고 있는 노숙인, 싸구려 노점상이 즐비하다. 동묘 정문은 큰길을 등지고 남쪽으로 나 있어 길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온통 시골 장터 같은 벼룩시장을 이루고 어수선하다.

판타지의 공간으로 들어선 듯한 길목을 지나면 ‘동묘공원’이라고 새긴 큰 표지석이 보인다. 여기가 바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동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 보물 142호인 동묘, 곧 동관왕묘가 있고,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성인군자 같은 유비, 전략의 귀재 제갈량, 괴기스러운 조조와 달리, 관우는 신장 9척, 수염 길이 2척에 긴 일월도에 적토마를 탄 사내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동묘 본실의 중앙 뒤쪽에 단을 만들어 세운 관우상.

동묘에 들어가면 낯선 분위기에 잠시 발을 멈추게 된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 있고 검은 벽돌로 두껍게 쌓아올렸다. 전면을 제외하고는 온통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중국풍이다. 서울이 아니라 잠깐 베이징(北京) 어드메쯤 온 듯한 환상에 빠진다.

관우를 숭앙하는 서당을 왜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시로 썼을까. 그런데 김수영은 이 작품을 등단작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묘정의 노래’는 내가 생각해도 얼굴이 뜨뜻해질 만큼 유창한 능변이다. 그 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마음의 작품목록에서 지워버리고, 물론 보관해둔 스크랩도 없기 때문에 망신을 위한 참고로도 내보일 수가 없지만, 좋게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시를 썼다는 증거는 될 것 같다”(‘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227면)고 남겼다.

한자가 많이 나오고 무슨 뜻인지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 이 시는 끝까지 읽는 것만 해도 1945년 해방기 시단의 고리타분한 단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김수영이 벗어나고 싶어했던 무의식의 한 부분을 확인해볼 수 있는 소품이기도 하다. 안 읽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시가 ‘김수영’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최초의 시이고, 김수영 자신이 지우고 싶어하는 ‘비아(非我)의 김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수영의 극복하고 싶어했던 상처의 지점이라는 뜻이다.



묘정(廟廷)의 노래

1.

남묘(南廟)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寡婦)의 청상(靑裳)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朱雀星)/ 깃들인 시전(矢箭)/ 붉은 주초(柱礎)에 꽂혀 있는/ 반(半)절이 과(過)하도다// 아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성화(星火)/ 서리 앉은 호궁(胡弓)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한아(寒鴉)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2.

백화(白花)의 의장(意匠)/ 만화(萬華)의 거동의/ 지금 고요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관공(關公)의 색대(色帶)로 감도는/ 향로(香爐)의 여연(餘烟)이 신비한데// 어드메에 담기려고/ 칠흑(漆黑)의 벽판(壁板) 위로/ 향연(香煙)을 찍어/ 백련(白蓮)을 무늬 놓는/ 이 밤 화공(畵工)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1946.1)



‘묘정의 노래’에서 묘정은 종묘와 명당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이 시는 영령을 모신 곳에 가서 느낀 바를 적은 소품이지만, 좁혀 말하면 ‘관우 사당의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1연에서 남묘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김수영이 갔던 곳은 남묘가 아니라 동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가령 울산성에서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싸울 때 관우의 영령이 출현하여 포위망을 뚫어주고 승리하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명 황제 신종(神宗)이 알고, 동대문 밖에 ‘동묘’가 들어선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며, 공사가 완공된 것은 선조 34년(1601년)이었다. ‘남묘’라고 쓴 것은 김수영의 실수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수영 자신이 이 시를 설명하면서 ‘동묘’에 다녀와서 썼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예술부락’이라는 동인지에 나온 ‘묘정의 노래’라는 것이, 인쇄로 되어 나온 나의 최초의 작품이다. 그때 나는 연현에게 한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고, 그것이 대체로 소위 모던한 작품들이었는데, 하필이면 고색창연한 ‘묘정의 노래’가 뽑혀 실려졌다. 이 작품은 동묘(東廟)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는 내가 철이 나기 전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나의 어린 시절의 성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거대한 관공(關公)의 입상(立像)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공포가 퍽 좋아서 어른들을 따라서 두 손을 높이 치켜 들고 무수히 절을 했던 것 같다.” ㅡ‘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226면.



이 글에 보면 김수영이 “동대문 밖”이라 했듯이 동묘가 확실하다. 더욱이 “관공의 입상”은 동묘에 있다. 남묘에는 관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김수영의 실수 혹은 어떤 다른 의미가 있었을까 싶다. 김수영이 갔던 곳은 1602년 봄, 명나라 신종의 칙령에 의해 서울에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준공된 흥인문(동대문) 밖에 세워졌으므로 ‘동관왕묘’, 지금의 동묘다. “이미 과부의 청상이어라”(1연)에서 ‘청상’은 푸른 치마를 말하는데, 김수영은 과부의 푸른 치마라는 표현을 통해 이미 과거의 것으로 흘러가버린 역사를 암시하고 있다. 동묘는 중국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아 건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 김수영의 무의식에는 전통이란 과거의 것, 이미 아름다운 시절이 지난 과부의 푸른 치마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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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 구절은 이후 김수영의 시어와 전혀 다르다. 지나친 한자어와 조금 뻔한 영탄으로 맺고 있다. 주작성은 이십팔수 가운데 남쪽을 지키는 일곱 별이다. 시전은 화살과 화살대를 말한다. 주초는 건물의 기둥 아래에 받치어 놓은 주춧돌을 말한다. 3연은 영탄이 과장된다. 성화는 지구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와 빛을 내며 떨어지는 유성을 말한다. 호궁은 현악기의 한 종류다. ‘사위스럽다’는 어쩐지 불길하고 꺼림칙한 분위기를 말한다. 4연에서 한아는 까마귓과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잠귀’는 잠결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각을 말한다. 5연에서 의장은 시각을 통하여 미감(美感)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관공의 색대로 감도는”이라는 구절은 금으로 만들어진 관우 입상의 신비감을 표현한다. 동묘에 있는 관우 상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 황제가 직접 금을 보내 1602년(선조 35년) 만들어졌다. 본전 내부에는 약 2.5m 크기의 금동 관우상이 있으며 유비와 장비의 목조상도 있다. 5연은 관우의 입상 주변에 감도는 “고요히 잠드는 얼”을 회감시키고 있다. 6연에서 벽판은 천장이나 벽을 바르는 데 쓰는 널빤지를 말한다. 조선 후기 숙종이 처음 동묘에 들러 예를 표한 뒤 영조가 방문해 어필을 남겼고 고종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렸다. 백련은 흰 빛깔의 연꽃이다.

임진왜란 후 느닷없이 들어선 관왕 서당은 정치적으로 대국(大國)의 정신문화가 다시 우리 문화를 압도하는 상징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왕’, 곧 대국의 위상은 조선 땅과 시인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렸다. 무당굿에 어김없이 관우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도 대국의 무의식에 짓눌려 있는 무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시인은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라며 불안한 무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김수영의 전통관과 관련 있다. 이 시에서는 ‘울음’이 반복되고 있다. 4연에서는 까마귀가 울고, 6연에서는 사람이 운다. 그 울음은 “열사흘 달빛”이나 “과부의 청상”과 어울려 청승맞고 슬프기도 하다. 일본에서 만주를 거쳐 경성으로 돌아온 이십대 청년 김수영의 마음이 “과부의 청상” 같고 울고 싶은 짐승 같았을 것이다. 해방 직후 좌우익 예술인들의 대립 속에서 김수영은 임화의 청량리 사무실에 찾아간다. 임화를 만날 무렵 김수영은 ‘연극에서 시로’ 전향하기로 한다. ‘묘정의 노래’는 연극에서 시로 전향하는 ‘우울한’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울음은 18년이 지나 발표한 ‘거대한 뿌리’에서 분노로 바뀐다.

그는 네 가지를 거부한다. 첫째 관념적으로 “비숍 여사”와 연애 곧 독서에만 몰입해 있는 “진보주의자”, 둘째 “사회주의자”, 셋째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로 상징되는 관료주의, 넷째 관우 추종과 연계되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리고 그가 살려내고자 하는 것들을 나열한다.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ㅡ‘거대한 뿌리’(1964)에서



4·19 이후 김수영은 역사를 이끄는 힘은 사대주의적 전통이 아니라 민초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민예(民藝) 같은 ‘무수한 반동’이라고 보았다. 지나친 한자 사용과 사대주의적인 상처가 가득 찬 ‘묘정의 노래’는 당연히 김수영이 지우고 싶었던 상처였고 약력이었다. 이것은 김수영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무의식에 똬리 틀고 있는 무거운 의식의 한 부분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김수영이 벗어나고 싶어했던 등단작 ‘묘정의 노래’는 전통에 대한 김수영의 내적 심리를 드러낸 작품이다. 김수영이 지우고 싶어했던 ‘김수영 아닌 비아(非我)’야말로, 역설적으로 김수영 자신이었던 것이다. 전통에 짓눌려 있었던 해방기 20대 젊은 청춘의 우울한 판타지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퀴퀴한 소주 냄새가 가끔 질펀한 동묘 근처에만 가면 김수영의 ‘묘정의 노래’가 떠오른다. 저녁이면 꽤나 쓸쓸한 저곳은 김수영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뿌리’를 발아시켰던 곳이었다.

김응교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