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형석 명예교수는 1985년 9월 13일 정년퇴임 강의를 잊지 못한다. 그날 학생들이 5공 군부정권에 저항하는 시위를 하다가 김 교수의 고별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을 메웠고, 그들의 옷에 묻은 최루가스가 강의실에 퍼졌다. 최루가스 때문에, 학생들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김 명예교수가 당시 인문대 건물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조만식·안창호·김일성·김성수·김수환·안병욱·황장엽

사교적인 성품은 아니지만, 김형석 명예교수가 한 세기에 걸쳐 만난 사람들을 보면 대략 우리 현대사가 나온다. 앞서 말한 대로 고당 조만식과 도산 안창호를 뵈었고, 김일성도 만났다. 인촌 김성수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월남 직후 인촌 선생이 세운 중앙학교에서 7년간 받은 영향이 너무 커요. 그분에게 제가 배운 것이 첫째는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마라, 둘째는 동료를 비방하지 마라, 셋째는 편 가르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자기가 받아들인 사람은 끝까지 위해 줘요.”

그는 인촌을 친일파로 모는 진보 쪽에 대해 ‘닫혀 있다’고 비판한다.“도산 선생이 다시 수감돼 병원에 머물렀는데 생활이 몹시 어려웠어요. 도산이 믿을 만한 여자분을 인촌에게 보내 돈을 부탁했어요. 인촌이 그 여자분을 차갑게 외면하고 돌려보냈답니다. 나중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시켜 돈을 보내더랍니다. 그 여자가 밀정일지 몰라 사려 깊게 처리하신 거죠. 인촌의 삶 중에 극히 일부만 보고 그를 친일했다고 하는 건 참 무례해요.”

시인 윤동주와는 숭실중학교 동창이고, 일본 유학도 같은 시기에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조치대 철학과 후배이고, 정진석 추기경은 중앙학교 시절 제자다. “윤동주에 대한 기억은 얘기할 수가 없게 많죠. 조용하고 사색적이고. 김수환 추기경은 사회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분이 추기경이 돼서 선언한 것이,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거였는데 그분의 관심사하고도 같죠. 정진석 추기경도 아주 정의로운 학생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김 추기경 생전에 두 분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어요.”

안병욱·김태길 교수와는 평생을 같이한 친구다. 그는 자신이 깊은 교류를 가진 사람 중 인촌 다음으로 좋은 성품을 가진 분들이라고 평했다. 강원 양구에는 안병욱·김형석을 기념하는 ‘철학의 집’이 있다.

그는 주체사상을 기초한 황장엽과도 인연이 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몰랐고, 그이가 망명한 후 몇 번 만났죠. 황장엽 씨를 만났더니 ‘김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일찍 월남하셨는데, 저는 그러지 못해 인생이 이 꼴이 됐습니다’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