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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 건국대 특임교수, 한경연 초빙연구위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앞두고 한국은 AIIB 설립을 반대하는 미국과 한국 가입을 권유하는 중국 사이에서 딜레마에 직면했다. 미국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가입을 선언해 한국을 더욱 어렵게 한다. AIIB는 기본적으로 30년간 고성장을 마감하고 중성장기로 진입한 중국 경제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신(新)실크로드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 마련에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전후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대표되는 미국 중심의 국제 통화금융 질서에 대항해 중국 중심의 신국제 통화금융 질서를 구축하려는 전략의 하나다. 중국은 IMF에 대응해 긴급외환보유기금(CRA), WB에 대응해 신개발은행(NDA), ADB에 대응해 AIIB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반대 이유다.

중국은 내년 초 출범을 목표로 설립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 가입을 권유하는 데는 지금까지 가입 확정 아시아 역내 국가는 대부분 경제적으로는 중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동남아 국가들이고, 큰 나라는 인도뿐이다. 일본을 배제하고 있는 중국 입장에선 중화권 은행이 아니고 명실공히 아시아 역내 다자간 개발은행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한국의 가입이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이 미·일 중심의 ADB에 대항하는 듯한 AIIB에 가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점이다. 자칫 잘못해 미국 중심의 전후 국제 통화금융 질서에서 중국 중심의 신국제 통화금융 질서로 비중을 옮기는 것으로 비칠 경우 적잖은 파장이 초래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입하지 않을 경우 중국이 한국 최대 수출시장임은 차치하고라도 앞으로 북한 문제에 관해 중국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상황이 올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에 대해 중국이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이라는 점, 한·미의 공통 관심사인 북한 문제에 중국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 현실적으로 주로 동남아시아 개발 지원에 치중해 온 ADB의 재원만으로는 중국 서부 대개발에는 역부족이어서 기존 질서의 대체가 아니라 보완적 차원에서 새로운 다자간 개발은행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점, 비록 한국이 AIIB에 가입하더라도 순순한 경제적 차원이며 전통적인 한·미 동맹 관계는 더욱더 공고히해야 한다는 점 등에 관해 충분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외교가 필요하다.

아울러 중국에 대해서도 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전통적인 한·미 동맹 관계 유지가 한·중 공통 관심사인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에 중요하므로 미국 입장을 무시할 수 없는 한국 입장을 이해시키고, 더 나아가 이런 입장에서도 한국이 가입할 수 있도록, 미국이 우려하는 AIIB의 과도한 중국 주도 지배구조를 완화해 더 투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나친 중국 지분율, 즉 의사결정권에 대한 우려를 줄이기 위해 필요하면 일본은 물론 미국·영국·유로존 등 역외 국가에 대한 개방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북한 등 동북아 개발을 위한 동북아 개발은행 기능도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등에 관해 충분한 의견을 나누고 이해를 같이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미·중의 이해를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외교를 토대로 가입을 추진해야 한다. 강대국 사이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샌드위치가 되는 건 아니다. 전략과 외교가 우수하면 캐스팅보트를 쥘 수도 있다. 국익 중심의 고도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