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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오우, 여기 이런 게 있었구나.

지난봄에 문화일보 근처 정동길(서울 중구 정동)을 산책하다가 중명전(重明殿)을 만났다. 정동극장 옆 골목에 접어들어서였다. 붉은 벽돌의 아치형 양식이 독특한 느낌을 주는 2층 건물. 안내 표지판을 보니 ‘중명전’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러시아풍으로 설계해 지은 황실 도서관.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며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이 중명전은 현재 대한제국의 역사를 되새기는 전시관으로 활용되는 한편 문화재 지킴이 역할을 하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사무실로도 쓰이고 있다.

김종규(75)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당초 사무실이 경복궁 안에 있었는데, 지난 2010년 중명전으로 이사를 왔다”고 소개했다.

김 이사장은 2006년 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위원회가 발족했을 때 위원장을 했다. 이듬해 공식적으로 조직이 출범하면서 초대 이사장은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이 맡았다. 유 이사장이 3년간 일한 후 자연스럽게 바통을 김 이사장에게 넘겼다. “일을 되돌려받은 셈인데(웃음),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이지만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니 기쁘게 하고 있어요.”

지난 24일 중명전에서 만난 김 이사장은 평소처럼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잠시 표정을 굳히기도 했으나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남도 사투리 억양이 남아있는 그의 말투는 질박하면서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한번 이야기를 꺼내면 술 없이도 보통 3시간 넘게 끌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풍성한 문화 콘텐츠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학자·문학인·음악가·연극인·정치인·관료·기업인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인맥을 자랑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문화계 최고의 마당발이다. 그에게 물었다.

“문화계 안팎의 각종 일에 관여하고 수많은 행사에 홍길동처럼 참석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피곤하지 않나.” 그는 바로 대답했다. “즐겁게 하는데 뭐가 피로한가. 논어에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무엇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내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좌우명은 ‘시인신물념 수시신물망 무도인지단 무설기지장(施人愼勿念 受施愼勿忘 無道人之短 無說己之長)’. ‘누구에게 베푼 것은 결코 생각하지 말며, 받은 것은 결코 잊지 마라. 다른 사람의 단점을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자기 자랑은 함부로 하지 마라’는 뜻이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이 좌우명을 그대로 실천하는 보기 드문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화계 원로 명망가이면서도 도무지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언행이 바로 이 좌우명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우명대로 살려고 애쓰는데, 솔직히 잘 안 돼요”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보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취득해서 잘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관 협력기관이다. 국민·기업·단체·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기부·증여받거나 위탁받은 재산과 회비 등을 활용한다.

―문화재 관리는 국가가 전담해야 하지 않나. 왜 시민까지 나서야 하나.

“쌀농사에 물을 대는 것에 비유하자면, 국가가 문화재를 소장·관리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종의 댐이다. 쌀농사를 위해선 못과 저수지도 필요하듯이 문화재를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이들도 많아져야 한다. 가보로 대물림하든, 매입하여 소장하든. 어떻게 국가가 수많은 문화재를 다 지킬 수 있겠나. 없어져 가는 것들은 누군가 돈을 줘서라도 사서 지켜야 한다. 동네 당산나무도 보호해야 하고, 불화(佛畵)도 보호해야 한다. 문화유산이란 것은 댐, 못, 저수지가 함께 논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하듯 국가와 국민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한다. 내 논리는 이렇다. 백자 달항아리 하나만 해도 어떤 작품은 구입하려면 50억 원이 넘게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몇몇만 나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근대미술관은 개인이나 기업들이 다 사서 기증한 유물들로 가득하다. 그런 운동이 확산돼야 한다.”

(기증한 사람에게는 국가가 명예를 주고, 세금도 깎아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홈페이지를 보니 ‘영국 내셔널트러스트를 모델로 했으나 우리 전통 공동체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던데.

“우리 어릴 적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일했다. 향약을 봐라.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을 함께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있다. 국민신탁은 우리의 전통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를 모델로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따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는 시민운동은 국민신탁 이전에도 존재했다. 경주의 신라문화동호회, 광주광역시의 대동문화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덕분에 문화유산을 국가와 시민이 공동관리하려는 뜻이 점점 커졌고,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경기 군포시 소재)과 윤경렬 옛집(경북 경주시 소재)을 기증받으면서 국민신탁이 본격적 행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매월 회비를 내는 회원 수가 7000명에 근접하고 있다고 들었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데….

“ 하하, 10만 양병설은 내가 꿈으로 한 이야기인데, 그게 매스컴에 보도돼서…. 지난 2007년 출범 때 목표가 회원 1000명이었다. 지난 2010년 내가 이사장을 맡을 때 200여 명이었다. 그 후 급속도로 회원이 늘어나서 7000명에 달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직원들은 1000명 단위를 넘어설 때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스러워한다.(직원들은 회원 급증 이유로 김 이사장의 인맥과 열정을 들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취지를 설명하고 회원 가입을 권유한다는 것이다. 기자도 몇 달 전에 그의 설득에 넘어가 회원이 됐다.)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게 좋아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다른 회원을 끌어온다. 이런 추세라면 10만 명이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다. 영국 내셔널트러스트는 현재 회원이 420여 만 명인데, 전통이 120년이나 된다.”

―며칠 전 덕수궁에서 회원의 날 행사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인력과 경비가 많이 필요할 텐데.

“기업을 해 봐서 아는데, 조직 운영의 경비는 대부분 인건비가 차지한다. 우리 조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원봉사자가 많아져야 한다. 이 숫자가 바로 문화 선진국의 바로미터다. 도네이션(Donation) 문화도 정착돼야 한다. 2005년 국제박물관대회를 할 때 정부 예산은 7억 원이었다. 대회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선 30억 원 이상을 모금해야 했다. 당시 한국박물관협회장으로서 대회 운영위원장이었던 나는 각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도네이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니까 유머를 섞어 말했다. 도네이션 발음을 하며 ‘돈내시오’라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더내시오’, 나중에는 ‘다내시오’라고.(웃음) 아무튼 뜻있는 분들이 도와주셔서 기금을 모아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다.”

―국민신탁을 평소에 적극적으로 돕는 인사들이 있다고 들었다.

“많은 분들이 협력한다. 그중에서 국민신탁 이사인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의 열정을 높이 산다. 우리도 영국 내셔널트러스트처럼 돼야 한다고 참 열심히 참여한다. 오늘 아침에도 개인적인 모임에 가면서 국민신탁을 홍보하고 싶다며 자료들을 한 아름 챙겨 가더라. 우리가 인근의 정동길 탐방 코스를 만들었는데, 관할인 중구에서 예산을 일정 부분 지원해 준다.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최창식 중구청장이 잘 발전시켜보자고 하더라. 최 청장은 주변에 코스 소개도 하고, 회원 가입도 적극 권유해주고 있다.”

―국민신탁 고문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이인호 KBS 이사장은 자주 만나나.

“2006년 국민신탁 설립준비위원장을 할 때부터 두 분이 고문이었다. 시작부터 함께 일했는데,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 아시다시피 두 분 다 훌륭한 학식과 인품을 갖추셨다. 특히 이인호 고문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지닌 분이다.”

―국민신탁을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전남 ‘보성여관’을 복원해 역사체험시설로 개관할 때 그 존재가 알려졌다.

“맞다. 2008년 보성여관 관리단체로 지정된 후 4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2012년 6월에 개관했다. 그때 어떻게 하면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을까 고민했다. 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 영화 ‘태백산맥’의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 그리고 복원 시설 설계자인 김원 건축가, 벽화를 그린 이종상 화백, 이 네 분에게 부탁해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러니 언론이 관심을 보였고, 자연스럽게 국민신탁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을 매입해 102년 만에 되찾은 것도 우리 신탁의 존재와 목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

―최근 강릉 선교장(船橋莊)에 백범 글씨를 기증했다던데.

(백범 김구 선생은 1948년 강릉 선교장 주인인 이돈의 선생에게 글씨(‘天君泰然’)를 써서 보냈다. 이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것이 1962년 도난당했는데, 최근 경매에 나온 것을 김 이사장이 구매해서 선교장에 기증한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백범의 아들인 김신(전 공군 참모총장) 백범김구기념관 관장이 보내온 감사 편지를 소개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금번 기증에 즈음하며 회장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문화재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것과 같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더 빛이 나고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이 백범 선생과 선교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공공재로 자리매김하기 바란다’. 이러한 말씀에서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 곧 ‘天君泰然’을 느꼈습니다.”

(김 이사장은 출판업을 해서 번 돈을 박물관 사업과 문화재 지키는 일에 쓰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를 일컬어 ‘항산(恒産)이 있어 항심(恒心)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전임 박물관협회장 시각으로 봤을 때 국내 박물관들은 이전에 비해 진화했는가. 인기 테마 박물관만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경향도 있는데.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1990년대에 2000년대까지는 우리나라에 박물관이 1000개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예측이 다 맞아떨어졌다. 식물원, 동물원, 수족관까지 포함한 숫자이긴 하지만 그동안 많이 늘어났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열심히 만들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나쁜 것은 다 걸러지게 되어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엉성한 게 아닌가. 수요자들이 취사선택을 할 것이다.”

―1990년 국내 최초의 출판박물관을 만들게 된 계기는.

“기업의 사회환원에 대해 생각했다. 강철왕이라 불리는 앤드루 카네기는 60대에 기업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한 20년간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그의 훌륭한 삶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출판으로 돈을 벌었으니, 출판박물관을 해서 사회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금속활자 최초 발명국이고, 팔만대장경도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인들이 놀란 게 우리 시골 곳곳까지 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린 얼마나 문화 민족인가. 또 노후대책도 생각해봤다. 노후 하면 경제적인 부분을 떠올리지만, 진짜 노후 대책이란 할 일이 있는 거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는 엄청난 재벌은 아니다. 삼성출판사 창업은 형님(김봉규)이 해서 내가 2대 사장으로 이어받은 거다. 20대에 형님의 지시로 부산에 내려가 대한도서주식회사에서 남의 밥을 먹은 후에 삼성출판사 부산 지사장을 했다. 10년을 지내고 와 서울에 와서 상무가 됐다. 그 후 출판사 전무, 부사장, 사장, 회장을 거쳐 박물관장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에 이어령 전 장관이 1000개의 박물관 이야기를 한 게 떠올라서 박물관을 개관했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품 중엔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월인석보’ ‘남명송증도가(南明頌證道歌)’ 등 국보·문화재급 서적이 다수 있다. 그가 이것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부친과 형의 구박을 많이 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980년대에 초조대장경을 구입할 때는 당시 돈으로 2억 원이 필요해 처남(임인수 한림출판사 사장)에게 돈을 빌리면서 “절대로 형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돈만 들어가는 박물관을 하는 나를 아버지는 미친 놈으로 여기고 형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물관 개관 행사 때 이어령 당시 장관이 와서 축사를 하고 5주년 때는 이홍구 총리가 왔다. 그렇게 주변에서 인정을 하고, 박물관의 모습 자체가 근사하니까 형님이 ‘우리 종규 말이 맞았다’고 말해줬다.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나더라.”

―형님과의 사이가 각별하게 느껴지는데.

“그렇다. 8살 차이가 나는데 늘 의지하고 힘이 돼줬다. 나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형수가 시집을 왔다. 지난해 형수 생일잔치 때에 내가 그랬다. ‘동생이 형보다 나은 거 같다’고. 이유인즉 옛말에 동생은 형수 젖을 만지지만 형은 제수씨 젖을 못 만지니까.(웃음) 어느 해인가 MBC 다큐프로그램 ‘성공시대’에서 나를 찍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고생한 게 없고 다 우리 형님이 한 것이니 형님을 찍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동반 출연을 요청하더라. 자기네들이 알아서 찍겠다는 거다. 그래서 ‘떽! 나쁜 사람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형님이 대인관계에 소극적이라 내가 더 유명세를 탄 건 사실이지만, 내가 ‘성공시대’에 나갈 일은 아니다. 그래서 거절했다. 다들 바보라고 했지만, 제작진이 돌아서 가면서 존경한다고 하더라.”

인터뷰=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가꿔서 후대에 전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시민이 기쁘게 짊어져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정하종 기자 mal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