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9월 30일 월성 원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원전 가동 중단과 이주 대책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내일 당장 농성하다 누가 죽어 나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그런데 정부나 한수원이나 왜 이렇게 무사태평인지 몰라.”

지난 9월 30일 월성 원전이 위치한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월성 원전 홍보관 옆 왕복 2차로 도로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협력업체 직원 정모(42) 씨가 시위대를 바라보며 “날이 갈수록 시위 구호가 과격해지고 있다”고 한숨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원전돔을 배경으로 5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60∼70대 노인들이 대부분인 시위대는 “원전 때문에 이리 죽나 저리 죽나 똑같다”고 비장한 구호를 외쳤다.

김정섭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월성대책위) 위원장은 “원전 때문에 건강도 잃고 관광객도 줄어 생계가 다들 막막해졌다”고 말했다.

◆방치된 사이 점점 커져가는 갈등의 골… 지금이 갈등 해결의 마지막 기회

월성대책위는 올해 말쯤 결정될 월성 1호기의 수명연장 여부를 앞두고 한수원에 “발전소와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지난 8월 25일부터 집회를 시작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원전과 함께한 주민들이 이제 경제적 보상을 원하지만 이들을 상대해야 할 정부는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되면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농성이 더욱 과격해질 가능성이 크다. 혹시 유혈사태라도 발생하면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로 심상치 않은 국민 여론까지 들썩거릴 것이다. 이처럼 월성 원전을 둘러싼 갈등은 방치된 상태로 폭발을 향해 달리는 ‘폭주기관차’를 닮았다. 송재룡(사회학) 경희대 교수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이제껏 놓쳐왔고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비선호시설 분쟁 패턴 따라 증폭되는 갈등

전문가들은 월성 원전을 둘러싼 갈등이 이론적으로 비선호시설 관련 공공갈등 패턴을 따라 진행되고 있어 예측가능성이 높은 만큼 마음만 먹으면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3년 동아대 행정학과 조창국 씨의 박사논문 ‘원전정책의 집행과정에 나타난 갈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원전과 관련한 갈등은 크게 이익갈등, 신뢰갈등, 가치갈등의 단계를 거치는데 월성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월성대책위는 원전 건설에 따른 관광객 감소 등 재산상 피해를 보상하라며 이주 지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한수원 측이 보여주는 ‘불소통’의 자세에 신뢰갈등을 빚고 있다.

이강원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여기에 반핵 운동이 겹치면 이익갈등, 신뢰갈등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가치(이념)갈등으로 이어진다”며 “지금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단계로 갈등이 증폭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화 창구도 없어… 갈등 방치의 흔적들

월성에서 갈등이 방치되고 있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주민과 한수원 측의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원전 걸설에 따른 경제적, 건강상 손해를 ‘이주 지원’이라는 대책으로 보상하라고 주장하지만 한수원 측은 “우리 권한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한수원 월성본부 관계자는 “원자력안전법에 따라 원자로 반경 914m(중수로 기준)는 ‘제한구역’으로 설정돼 한수원이 관리하는 지역이 맞다”며 “이 부지에 살던 주민들은 이주가 완료됐지만 이 부지를 넘어서는 지역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법적 권한이나 책임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지만 책임 있는 상위 부처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김승환 월성대책위 부위원장은 “지난 6월 산업통상자원부에 탄원서를 냈더니 한수원으로 이첩됐다고 했다”며 “그런데 한수원 본사에서는 또 월성본부장에게 일임했다고 말하는 등 서로 일을 떠넘기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과학도 믿을 수 없어… 쌓여만 가는 불신

대화의 장조차 마련되지 않다 보니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고 이런 상황에서는 과학적 설명도 무력해지고 했다. 원전 주변 주민들의 건강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던 지난 2011년 서울대학교 의학연구원 원자력 영향 역학연구소는 20년간 진행한 ‘원전 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를 통해 “원전과 주변 주민의 암 발병 위험성 간에 과학적으로 인과관계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갈등을 잠재우는 데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예컨대 원전 인근 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나타난 갑상선암 발병률을 두고 연구팀은 “원전 인근 주민들의 거주기간과 암 발생률이 비례하지 않아 원전 영향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반대 측은 “갑상선암이 방사선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수치가 나타났다”고 맞서고 있다.

한수원과 주민들은 과학적 입장 차를 두고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수원 월성본부는 “원전과 주민 건강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가 없다는 점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난감해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최근 10년간 40여 명이 암으로 고통 받은 이 마을에서 심정적으로 원전이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박했다. 과학적 연구결과를 일방적으로 주민에게 알리는 방식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012년 대구가톨릭대 김쾌희 씨의 석사논문 ‘원자력발전소 주변지역 주민의 갈등과 인식’에 따르면 비선호 공공시설의 분쟁은 어떠한 위험에 대해 과학적 증거에 따른 판단을 하기보다 개인들의 사적 경험을 통한 주관적 판단을 통해 실제 위험을 평가하므로 전문가의 과학적 결과 홍보 등 계몽적인 방법이 큰 효과가 없다.

◆중재 역할은 먼나라 얘기

월성 원전 주변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데는 중재 역할의 부재도 한몫하고 있다. 갈등 당사자인 한수원과 월성대책위, 그리고 주민 투쟁을 도와주는 경주환경운동연합을 제외하면 권한을 갖고 갈등을 풀어나갈 만한 기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경주시 조례에 따라 지난 2006년 월성원전 민간환경감시위원회가 결성돼 안전성 조사와 발표를 실시하고 있지만 대화를 주선하는 권한까지는 갖고 있지 않아 제대로 된 중재기관으로 보기 힘들다.

조성배 사회갈등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원전 문제는 국가적인 에너지 수급 정책과도 연결돼 대화 당사자인 한수원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균형적인 제3자의 중재와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 에너지 정책에 대한 국민적인 의견 수렴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