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새누리당·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5월 취임 후 아직 법안을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4월 16일 여객선 진도 침몰 참사 이후 ‘세월호 정국’이 국회를 강타한 탓도 있지만 국회선진화법을 등에 업은 야권이 주요 민생 법안들을 ‘볼모’로 잡고 세월호특별법 등 야권의 요구 사항과 연계 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7, 8월 임시국회에서는 아예 본회의조차 열리지 않았고, 9월 1일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도 제대로 진행될지 미지수다.

이제는 선진화법을 이용해 쟁점 법안과 다른 법안을 연계하는 ‘소수파의 독재식 볼모 정치’를 정치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19대 국회 들어서 여야 대치→야권의 법안처리 ‘인질’ 잡기→국회 파행→야당의 장외 투쟁→지리한 공방→‘용두사미’ 결론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풍경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매년 반복돼 익숙해져 버렸다. 2년 전 2012년 5월, 18대 국회 임기를 채 한 달도 남겨 놓지 않고 여야는 국회선진화법 처리를 놓고 진통을 겪었다. 야당은 자연스레 수십 개 민생법안을 볼모로 잡았고, 결국 여야 합의로 국회선진화법과 민생법안이 함께 처리됐다.

2013년 초 박근혜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정부조직법을 놓고 야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모든 의사 일정을 보이콧했다.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정부 여당의 ‘태생적 약점’에 ‘소수의 독재’가 가능해진 국회선진화법까지 더해지며 야당의 ‘볼모 정치’는 계속됐다. 시급히 처리돼야 할 민생·경제 법안이 해당 상임위나 본회의에 발목이 묶여 수개월씩 처리가 지연됐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무더기 법안 처리 지연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여야는 방송법 개정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고 야당은 ‘전가의 보도’처럼 다른 이견이 없는 법안들을 방송법과 연계해 처리를 막았다. 이로 인해 핵테러 방지를 위한 원자력방호방재법 처리가 계속 지연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3월 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을 앞두고 새누리당은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약속한 핵테러 억제협약 및 핵물질방호 협약과 관련된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며 야당을 압박했으나 당시 민주당(새정치연합의 전신)은 방송법 개정안과 타 법안의 일괄처리를 주장하며 합의해 주지 않았다. 결국 단말기 유통법을 비롯해 미방위에 계류됐던 약 120여 개의 법안은 올해 4월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개정안 처리에 여야가 합의하며 겨우 통과될 수 있었다.

이 같은 볼모 정치는 현 야당(새정치연합)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야가 뒤바뀐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대표였던 2004년 당시 한나라당이 사학법 등 당시 여당이 밀어붙이던 4대 입법의 처리를 반대하며 다른 법안의 처리도 계속 늦어졌다. 당시 한나라당은 2004년 겨울 엄동설한에 무려 53일간 장외 투쟁을 벌였다. 이 기간 예산안 처리 등이 늦어지고 졸속으로 진행됐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장외 투쟁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실상 ‘항복’으로 겨우 끝나게 됐다.

한나라당의 법안 연계 정치는 계속됐다. 2006년 7월 28일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를 민생법안과 연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강 대표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민생법안과 쟁점 법안을 필요하면 연계할 것”이라며 “(야당이) 민생법이라고 주도적으로 처리해 주면 (여당은) 야당을 깡그리 무시하고 본인들이 원하는 법안을 날치기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시계를 좀 더 되돌려 2000년으로 가도 마찬가지다. 9월 8일 당시 한나라당은 여권의 선거비 실사 개입 의혹과 권력형 비리 의혹 등을 이유로 장외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추석을 맞이해 내놓은 당보에서 “한나라당이 의약분업 지원과 산불 및 구제역 피해 주민 보상, 서민 생계지원 등을 위해 편성된 추경예산안 처리를 외면해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이회창 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 전원은 장외 투쟁을 벌이며 국회는 자연스레 파행을 겪었다.

야당은 민생 법안을 볼모로 잡는 ‘인질 정치’를 벌일 때마다 “야당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무기가 이것밖에 없다”고 호소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역행하는, 국회가 스스로 반드시 끊어내야 할 악행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정부 여당의 폭주를 막는 안전 장치로만 바라보기에는 민생을 외면하는 폐해가 훨씬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여야가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구태’란 점에서 결국 정치권 전체가 결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야당의 계속되는 장외 투쟁과 연계 정치에는 ‘니들은 야당일 때 안 그랬냐’는 게 깔려 있다”면서 “그러나 야당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같은 인질 정치가 계속될수록 국민들은 이미 야당에 ‘사망 선고’를 내렸고 야당에 대한 평가가 끝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병기 기자 mingm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