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정수 씨가 서울 동작구 사당동 개인 연습실에서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 그는 배우를 꿈꾸는 젊은 후배들과 함께 일주일에 4일은 연습실에서 연기공부를 하고 있다.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대기업 중견간부 출신의 단역배우 김정수(59) 씨. 2011년 말, 현대건설 부장으로 명예퇴직한 그는 3년 차 단역배우이다. 한때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받았던 엘리트였고, 예순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배우로서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그는 요즘 현장에서 ‘바쁜데 단역배우가 NG 낸다’고 대놓고 야단맞고, 새벽부터 대기했다가 밤늦어서야 촬영분이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는 말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역, 그 몇 마디 안되는 대사, 외울 게 뭐 있느냐고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1000번 이상 읽고 외우고 나서야 카메라 앞에 선다고 한다. 주인공과 스타에게 온통 쏠려가는 시청자(관객)의 관심 뒤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했을 때 행복하기만 하다는 그를 지난 3월 2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대기업 중견 간부에서 단역 배우의 변신. 두 지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상당히 드라마틱한 변신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대학 연극반 출신의 오랜 배우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이 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대학 연극반 출신의 꿈을 이제 이룬 것인가.

“한국외대 스웨덴어학과 75학번으로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대엔 한 번도 못 올라가고 스태프만 하다 끝났다. 무대에 올라가면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연기도 반원들 사이에서 제일 못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갈증이 있었던지 쉰 살을 앞두고 직장인 연극 모임에 나갔다. 연극학교 비슷한 것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퇴근 후에 공부하고, 연극 무대도 올랐다. 퇴직하기 전까지 7년 정도 했다. 그러다 명예퇴직을 하게 됐다. 뭘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직장인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막연히 더 올라가겠지 생각하며 살았고, 은퇴 후 삶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출신이신데, 퇴직 후 당신의 오랜 취미였던 단전 호흡 강사일을 시작하셨다. 지금도 노인들을 상대로 단전호흡 강의를 하신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배우로 길을 정했다.”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당연히 싸늘했다. 경제적으로 수입이 없어진 데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직 젊은 나이니 경비원으로라도 취직하라는 말을 들었다. 가족의 냉대 속에 인터넷을 뒤지다 2012년 초에 SBS 드라마 ‘내 딸 꽃님이’에 세탁소 주인으로 2회차 출연하게 됐다. 운 좋게 시작했는데, 그 뒤 드라마 쪽에서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방향을 바꿔 영화과 전공학생들의 단편, 실습 작품들을 쫓아다녔다. 2년간 대학생들 실습용 단편 50여 편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15편 정도 했고, 영화 ‘집으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도 나왔는데 출연분량이 편집됐다. 그래도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름이 올라갔다.”

―나이 들어서 새 직업, 그것도 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퇴직 후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재미있겠다고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단역에도 나 같은 초보 단역이 있고, 10년 이상 경력도 있다. 아직 초보자이다 보니 현장에 가면 긴장이 많이 된다. 즉석에서 대사가 바뀌면 아직 적응이 잘 안된다. 단역이 NG를 내면 주변에 미안하고 괴롭기도 하다. 그래도 현장에서 만나는 대배우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1, 2년 지나니까 조금씩 긴장을 덜 하고, 자신감도 생긴다.”

―배우가 꿈이었다고 해도, 단역배우로 나서기 어렵지 않았나. 흔히 말하는 체면 같은 것은 없었나.

“체면, 지위? 그런 건 없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연기는 예술이다. 학생들의 단편작품에선 주인공 역할도 한다. 물론 현장에서 무시당할 때, 영화사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할 때 불뚝불뚝하기도 했다. 2년여 동안 온갖 경험을 다 했다. 하지만 그게 모두 약이다. 지금도 내 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오디션을 기다리고, 역할을 기다리고, 촬영장에서 기다리고, 항상 기다린다. 그래도 내 연기를 드라마로 볼 때 즐겁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연락을 해올 때 기쁘다. 어떤 사람은 영화에서 내가 나와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장 즐거운 순간은. 그리고 계획은.

“나이 들어 시작한 만큼 대사나 몸동작이 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연륜이나 사회 경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아무리 단역이라도 인생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연기는 체력만 되면 80, 90세까지 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매년 해외여행 갈 수 있고, 원할 때 골프 실컷 칠 수 있는 은퇴 후 생활과 지금의 단역 배우 중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연기를 택하겠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연기에 대한 갈증도 큰 그는 매주 4일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개인 연습실에서 연기공부를 하고 있다. 서울시에서 하는 시민 연극 교실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단역은 분량이 너무 적어, 연기가 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은 10년 내 조연급 연기자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은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이 아니지 않으냐”는 그는 단역으로 끝난다고 해도 실패는 아니라고 말했다. 순간의 쾌락과 행복이라는 두 가지 중에서 행복을 더 좋아한다는 그는 인내하고, 어려움을 견디면서 얻는 즐거움이야말로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삶을 설계하는 나이 든 사람들에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에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자기처럼 쉰이 넘어 꿈을 이루듯 인생은 아주 길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