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대구 동구 입석동 바른요양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피아니스트 출신의 김병수 씨가 어르신 환자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어린 시절 그는 ‘양반도시’ 경북 안동에서 남자의 금기를 깨고 피아노 학원 문을 두드렸고, 일반계 고교를 다니다 피아노 연주에 미쳐서 단식투쟁 끝에 예술고교로 전학했다. 이후 대학원을 졸업한 뒤 시간강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서울 강남구 못지않는 대구의 ‘사교육 1번지’ 수성구 중심에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대구 지역 최고의 학원 원장 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4년 전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부모님의 병환이 깊어지면서부터다. 그리고 요양병원에서 부모님과 같은 처지의 어르신 환자를 정성껏 돌보며 새로운 인생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간호조무사다. 하지만 간호사가 돼서 몸이 불편한 고향 어르신을 돌보는 사업을 펼치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병수(44) 씨. 아니 간호조무사 김병수 씨 이야기다. 지난 7일 오후 2시 대구 동구 입석동 바른요양병원 5병동 간호사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보라색 간호복장을 한 김 씨가 차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금방 교대근무를 한 뒤라 5병동의 환자 상태를 외우고 있었다. 치매, 골절, 말기암 등의 환자로, 이 병동에 41명이 입원해 있다. 그리고 그는 혈압계와 체온계 등을 들고 병실을 쫓아다녔다. 피아니스트의 섬세함이랄까. 다정다감하게 편찮은지 여쭙고 환자들과 포옹도 했다. 치매 환자 최모(여·80) 씨는 “오늘은 마이(많이) 피곤하고 심심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4명의 환자도 이구동성으로 김 씨를 졸랐다.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 씨가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곧 연주를 할 테니”라고 하자 환자들은 금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5병동 간호사실 앞에 휴대용 피아노를 설치하고 ‘소양강 처녀’ ‘무정천리’ 등을 연주했다. 김 씨는 병원에서 간호업무를 하면서도 옛 실력을 발휘해 연주회를 자주 열고 있다. 그는 이 병동 내 10명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중 유일하게 남자 간호조무사로 인기만점이다.

연주가 끝나고 간호사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경북 영양군에 사는 어머니(69)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허리는 괜찮으세요. 경칩(6일)이 지나 이제 농사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제가 주말에 갈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세요.” 그가 피아니스트에서 간호조무사가 된 사연이 짐작되는 안부전화였다. “부모님이 저 때문에 아파요. 간호를 하고 보답하기 위해서는 가장 빠른 길이 간호조무사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는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으나 3세 때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안동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누나(46)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에 반했고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73)는 늘 매를 들었다. “남자가 피아노를 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했어요. 양반도시 안동에서는 30여년 전만 해도 그랬어요.”

중학교 2학년 때인가? 결국 아버지는 매질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에게 두 손을 들고 피아노 학원을 보냈다. 수십 명의 원생 중 남자는 혼자였다. 아버지는 그러면서도 교사나 공무원이 되라며 안동고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그는 당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하면 피아노 현(絃) 위에 신문지를 덮고 밤새 피아노를 쳤다. 현 위에 신문지를 두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에 몰래 연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들통 나고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 듣기를 반복하다 고교 1학년 여름방학 때 3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아버지를 설득, 김천예술고교로 전학했다. 그는 3년 동안 오전 3시까지 연습을 해 1990년 영남대 음대에 입학했다. 이 대학 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는 대구 수성대 대학강사로 활동하며 2000년에는 수성구에 피아노 학원을 차렸고 대구 시내에서 연주회도 자주 열었다.

그는 2009년 경북 칠곡군 대구예술대의 외래교수가 돼 열성적으로 강의를 했다. 청강생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재능 있는 제자들의 연주에는 절로 가슴이 뛰었다”며 스스로 피아노 연주에 전력하고 더욱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하지만 운명을 바꿔 놓은 일이 벌어졌다. 그가 장만해 드린 영양읍내 7000㎡ 규모의 땅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이듬해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첩첩산중에 계시는 부모님이 아프다고 할 때마다 걱정하면서 의료지식을 배워서 치료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한 것이 간호조무사였다. 강의를 하면서 1년 동안 야간에 간호학원을 다녔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도 접었다. 이후 서울과 경북 청도의 병원에서 근무하다 2013년 1월 이 병원으로 옮겼다.

그가 병원을 옮긴 것도 부모님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척추관협착증 수술을 했으나 농사를 짓다 다시 다쳐서 척추 수술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녹내장에 시각장애까지 왔다. 그는 이 병원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른 환자들과 함께 정성껏 보살폈다. 한 달여 동안 간호 끝에 두 분은 퇴원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농사일을 전혀 하지 못해 모두 어머니 몫이 됐고 그는 주말마다 농사일을 거들었다. 2011년 여름, 한창 일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마을 어르신 대부분 꾸부정한 허리에 관절통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일을 하는 모습이 그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부모님은 물론 고향 어르신들을 위해 더 많은 의료 지식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2012년 병원 근무를 야간으로 바꾸고 자신이 한때 강사로 활동했던 수성대의 간호학과 신입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2013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다. “간호조무사로서 업무가 빠듯한데 강의와 연주회 부탁이 들어왔어요. 마다할 수 없어서 휴학했지요. 그러나 다음 학기에는 간호학과에 복학해 다시 학업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민간단체에서 수여하는 음악 치료사 자격증도 있다. “고향 영양군은 의료시설이 열악해요. 이곳에 지역의료기관을 설립, 음악과 의료를 접목해 지역 어르신들을 돌보고 싶어요.” 영양군은 지난해 10월 말 기준 1만8266명의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중이 31.3%일 정도로 고령화 지역이다. 그는 “의료기관은 어머니가 농사를 짓고 있는 땅에 30병상 이하 규모로 지어 평생 노인들을 돌보며 살고 싶다”며 “밑그림도 모두 그려놨다”고 말했다.

대구 = 박천학 기자 kobbl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