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양조장 ‘예술’을 운영하며 술을 빚고 있는 변호사 출신의 정회철 씨가 우리술 예찬론을 펼치며 환하게 웃고 있다. 홍천 =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국내 최고 명문대 출신의 변호사이자 고시촌 스타 강사, 대학교수 등의 사회적 명성을 버리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일 게다. 특히 화려했던 경력과 도시인의 삶을 포기하고 외딴 산골로 들어가 전통주를 만드는 일에 전념한다는 것은 ‘돈키호테’와 같은 행동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법학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전통주를 빚는 정회철(52) 씨. 그를 만나기 위해 21일 오후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자리잡은 양조장 ‘예술’을 찾았다. ‘예술’이라는 상호는 ‘예로부터 내려온 술’과 ‘술을 만드는 작업이 마치 예술 같다’는 의미를 합친 것이다.

구불구불한 시골 지방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곳에서 만난 정 씨는 개량한복을 입고 덥수룩한 수염에 꽁지머리를 땋아 ‘도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만나자마자 한옥주택을 개조한 양조장의 구석구석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약 15㎡씩으로 이뤄진 2개의 발효실에서는 120ℓ짜리 항아리가 한 곳에는 탁주, 다른 한 곳에는 청주가 각각 20개 내외씩 발효 중이었으며, 섭씨 35도의 누룩실에는 자연상태의 균이 잘 배양되도록 볏짚을 깔아 놓고 10여 개의 누룩을 올려 놓았다. 또 숙성실에는 발효가 끝난 술을 거른 뒤 숙성시키거나 완성된 술을 담아 놓은 스테인리스로 된 80ℓ짜리 통 33개와 40ℓ짜리 통 12개가 가득 차 있었다.

정 씨는 예전의 강의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듯 자신의 인생역정을 활짝 풀어놓았다. 그는 “1981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 등으로 학점 취득에 소홀해 2학년 때 제적당한 뒤 민주화 운동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4년 특례 재입학했다”며 “졸업 후 1998년 사법고시 40회에 합격해 2년 동안의 사법연수원(30기) 과정을 마친 뒤 판사임용을 신청했으나 파업주도와 노조 민주화 운동 전력 때문에 임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법무법인에서 잠시 변호사 활동도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 데다 사법연수원 시절 틈틈이 쓴 ‘논점강의 헌법’ 등 헌법수험서가 출판돼 인기를 끌며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고시학원 강사로 나섰다. 이곳에서 그는 ‘헌법의 정석’으로 불리며 수강생들이 한 번에 1000명 이상 몰리는 스타강사로 5년 동안 명성을 날렸다.

또 2008년에는 로스쿨 바람이 불면서 1년 6개월 동안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집필 활동도 꾸준히 이어와 지난해까지 ‘기본강의 헌법’ ‘판례강의 헌법’ ‘사례 헌법 연습’ 등 헌법 수험서만 무려 10권을 출간했다.

강의와 집필 등으로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좋아하는 술맛을 보며 여행하기 위해 수시로 전국 양조장을 찾아다녔다. 정 씨는 “당시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막연히 좋아 아내와 함께 전국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 보니 직접 만들고 싶어져 인터넷에 올라온 제조법을 보고 혼자서 전통주를 빚기 시작했다”며 “항아리 속에서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며 ‘뽀글뽀글’ 맛있게 끓는 소리를 내는 것에 반해 술 빚기에 빠지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교수직을 사직한 뒤 술 빚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3년 동안 술 빚는 법을 터득한 뒤 이를 사업화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펄쩍 뛰었다. 그의 아내 조인숙(48) 씨는 “취미로 술을 빚을 때는 동참하기도 했으나 사업으로 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며 “실패하는 것이 두렵기도 해 못하게 말리는 등 강력 반대했으나 결국에는 남편의 논리에 설득당해 할 수 없이 허락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귀촌을 위해 2008년 구입해 놓은 1만5510㎡의 현 부지에서 2012년부터 독창적인 전통주 제조에 착수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배양한 가루 누룩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상태에서 120∼150일간 숙성·발효시킨 누룩과 홍천지역에서 재배한 햅쌀·단호박, 뒷산인 백암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100m 깊이의 지하수 등을 이용해 술을 빚었다”며 “특히 인공감미료 등 첨가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맛과 건강에 좋고 숙취도 없는 전통주가 탄생했다”면서 밝게 웃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정 씨는 찹쌀로 빚은 청주인 ‘동몽’과 탁주인 ‘만강에 비친 달’, 찹쌀과 맵쌀을 3대 1 비율로 섞어 빚은 ‘홍천강 탁주’를 개발했다. 이 술은 유명 백화점과 서울지역 막걸리 전문점 등에 공급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인터넷을 통한 판매도 시작했다.

정 씨는 이에 머물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전통주 제조법을 보급하기 위해 양조장 옆에 20여 명이 숙식하며 술 빚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우리술 문화체험관’을 오는 3월 말 완공할 예정이다.

전통주에 대한 각종 규제와 지원정책이 부족한 것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럽인들이 와인과 위스키, 맥주 등을 세계적인 술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가내수공으로 빚어왔기 때문으로 집에서 담근 전통주를 개인이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며 “전통주를 살리는 것은 문화를 살리는 것으로 이제부터라도 집과 마을마다 일상 속에서 고품질의 다양한 전통술이 익어가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씨는 “예전에 변호사와 고시학원 강사, 대학교수로 활동할 때보다 만들고 싶었던 전통술을 빚는 현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성취감과 함께 전통을 살리는 대의명분도 있어 마음도 편하고 훨씬 더 행복하다”며 “좋은 술, 완벽한 술을 빚는 것보다는 개성을 지닌 술을 만들고 우리의 전통술 문화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홍천 = 고광일 기자 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