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소방관 마술사’ 정영권 씨의 얼굴엔 늘 장난기와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마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전파한다고 믿는 그가 무대 위에서 액자 마술쇼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지난 1월 27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위치한 NC백화점 소극장. 5세 유아부터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이곳에 속속 모여들자, 분위기는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번에 제압하는 인물이 등장했다. ‘소방관 마술사’ 정영권(48) 씨다.

동심에 맞춘 의상과 ‘뽀로로’ 안경을 쓴 그는 걸걸한 목소리를 내뿜으며 단박에 어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의 마술은 독특했다. 유아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여느 마술처럼 불 꺼놓고 노래 트는 형식이 아니라, 만담과 개그가 어우러진 한 편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특히 그는 아이들의 ‘진실의 눈’을 이용했다. 눈에 보이는 정확한 사실을 ‘왜곡’한 뒤, 계속 우기면서 한꺼번에 “아니에요”라는 아이들의 외침을 유도하는 식이다. 마술에 대한 집중은 그렇게 시작되고 완성됐다.

“제 자랑이라고 하면, 무슨 공연이든 아이들의 웃음을 많이 유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술사의 체면이나 권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죠. 스스로 피에로가 되고, 광대로 변신해요. 그렇게 해야 진심이 전달되거든요.”

그는 ‘마술사 1세대’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본 서커스 유랑단의 한 마술사의 손가락 기술에 흥미를 느낀 뒤 마술에 직접 뛰어들었다. 당시 마술사는 전국에 두 명뿐이었고, 가르쳐주는 곳도 없었다. 그는 마술을 따라 하지 않고, 마술의 원리를 푸는 데 집중했다. 이른바 ‘마술 해체 작업’인 셈. 그렇게 원리를 풀다보니, 다른 마술 하나가 완성됐다. 서울 강남소방서 수서파출소 소방교로 근무할 땐 마술 학원에 1호로 등록했다.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마술 학원이 생겼어요. 바로 등록했죠. 그 학원에 지금 유명한 이은결 씨가 4기생으로 들어왔어요.”

소방관은 그의 집안 내력이다. 외할아버지가 소방관이고, 막내 동생도 현직 소방관이다. 이 직업을 천직으로 여겼을 법한 데도, 그는 지난 2006년 20년 1개월의 근무를 마지막으로 마술을 제2의 천직으로 삼았다.

“제가 근무한 강남소방서는 일이 많았어요. 화재 출동이 연간 1500건, 구급 출동도 2000건에 달했죠.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등 수없이 많은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목숨을 실시간으로 목격했어요. 퇴직 2년 전엔 화재 현장에서 불 끄다 죽은 후배까지 봐야 했어요. 그때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삶을 꼭 해보고 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소방관 재직 시절, 그는 뛰어난 아이들 해설자였다. 소방서를 견학온 아이들에게 소방차는 대장이 타는 차 등의 설명으로 인기를 얻었다. 몸은 40대지만, 마음은 10세 이하 유아기와 비슷했다.

“따로 공부한 적은 없었어요. 마술도 유아 교육도. 하지만 유아 프로그램은 정말 열심히 봤죠. 제 큰 아이가 대학 4학년인데, 저는 그렇게 ‘텔레토비’나 ‘뽀뽀뽀’ 같은 프로그램이 좋더라고요. 내 적성은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는 걸 새로 발견한 셈이었어요.”

명예퇴직 후 마술사의 길로 들어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보조금이 지원되다보니, 많은 유아 학원들이 문을 닫았다. 설 무대가 없어 30만 원 수입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공연도 중구난방이었다. 성인 무대에서 유아 스타일로 하니 비난이 쏟아졌고, 유치원에선 변검이나 버블쇼를 하다 안전상의 이유로 쫓겨나기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유아를 위한 마술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무조건 아이들을 웃게 하는 걸 목표로 매일 연구했어요. 오전 5시에 기상해서 뭘,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할까를 생각했죠. 남들은 마술사라고 소개하지만, 전 스스로 다르게 표현했어요. 소품은 마술도구로, 말은 개그맨처럼, 행동은 피에로같이 하는 멀티 퍼포머라고요. 특히 반복 동작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무대를 많이 만들었어요. 물론 선생님들은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하하.”

2008년 즈음, 그는 지방 공연을 마치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앞차의 적재물이 떨어지면서 난간 너머 15m 아래로 굴러 물에 빠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척추에 두 줄의 철심을 박아야 했다. 병원에서 처음에 하반신 마비라고 판정했을 때, 그는 “내가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전국의 아이들을 다 웃기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척추장애 5급 판정을 받은 그는 지금도 무대에서 2시간을 채 못 버틴다.

“그 사고에서 소방관이 절 구해줬어요. 소방관에 감사한 기분이 무엇인지 그때 절실히 느꼈어요. 마찬가지로 제 마술을 보고 희열과 감동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슴푸레 깨달았죠. 소방관과 마술사의 공통점은 상대방이 고마워하는 기분 때문에 결국 스스로가 즐거워진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멈출 수 있겠어요?”

그의 ‘희열’은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격언에서 출발한다. “20년 전 돈 받고 하는 공연을 해보니,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고요. 어느 날, 술에 약간 취해 즐기면서 공연을 하니까 엄청 반응이 좋았어요. 결국 마음 자세에 달려 있었던 셈이에요. 제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마술 공연에 희열을 느꼈기 때문에 좋은 공연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믿어요.”

텅텅 비었던 8년 전 스케줄 표는 이제 검은 글씨로 한 달 내내 채워져 있다. 주로 문화센터나 어린이집에서 이뤄지는 공연은 하루 200여 명, 한 달 전국 6000여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다. “마술사 중 스케줄에선 1위”라며 자부심도 대단하다. “가수로 따지면 댄스 가수만 득실거리는 시장에서 저 혼자 트로트 가수를 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다른 마술사들이 저보다 마술 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반응을 최고조로 이끌어내는 데는 어디서도 밀리지 않죠.”

그는 두 달 전 경기 안양의 한 선교원에서 공연한 뒤 원장님으로부터 ‘이 시대 방정환 선생님’이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며 “숨 쉬는 그날까지 아이들하고만 생활했으면 좋겠다”고 싱글벙글 웃었다.

어떤 면에선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이날 공연에서 “엄마보다 아저씨가 좋다”며 곁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