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협/정치부 차장

다 읽고난 뒤 유독 일본이 연상된 소설이 하나 있다. 작가 김영하의 장편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일본이 도대체 왜 이러나’ 해답을 찾지 못한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일본 지도자들도 모두 훌륭한 교육을 받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지성인들일 텐데. 브레이크 없는 그들의 망발 질주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터였다. 해답은 물론 찾지 못했어도 증상 진단에 대한 힌트는 얻었다. 인간의 본질과 고통을 탐구한 작가에게는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줄거리는 이렇다. 연쇄살인범 김병수가 주인공이다.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25년 전 은퇴를 결심했다. 아직 경찰에는 안잡혔다. 그런데 입양한 딸에게 최근 접근하는 젊은이 박주태가 딸을 해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한 김병수는 딸을 구하기 위해 죽기 전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들으면서.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사라졌다. 김병수는 박주태를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쯤부터 공포스러운 반전이 극으로 치닫는다.

역사책에 보면 일본은 1923년 간토(關東)대학살로 조선인을, 1937년 난징(南京)대학살로 중국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일본판 홀로코스트다. 수많은 만행은 물론이다. 그런 일본이 이젠 북한 핵위협과 주변 정세를 핑계로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 출동은 물론, 지구 반대편까지의 파병 방침도 노골적으로 밝혔다. 다시 소설의 결론. 온갖 증거가 지목하는 딸의 살해범은 김병수다. 그가 구하려던 딸은 자신을 보살피는 간호사를 착각한 것이고, 그가 의심한 박주태는 그의 살인행각을 좇아온 경찰이다. 김병수는 30년 전 어느 일가족을 살해할 당시 부모와 함께 딸을 죽이고, 자신이 데려다 입양시킨 걸로 착각하며 반평생을 살아오다 알츠하이머까지 겹쳤던 것이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그를 조작된 기억속에 살게 한 메커니즘의 출발인 셈이다. 감옥에서 무상이라도 깨달은 김병수의 고뇌를 일본에는 기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닌 듯하다. 아니, 아직 멀었을지 모른다.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집단 기억장애(dysmnesia)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공포마저 갖게 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국가 기억 조작’의 선봉에 서 있다. 전 국가 역량의 동원체제를 가동한 듯한 기류다.

왜 집단 기억조작인가. 떼로 해야 가책도 덜할 게다.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해도 자신들만 아니라고 우기는 데는 ‘그런 일이 나쁘다’는 정도는 안다는 역설도 숨어 있다. 일본 지도층 인사들은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와 다르다고 항변한다. 최근 만난 외교부 고위인사는 ‘왜’를 묻는 질문에 “일본 정치인들은 후손에게 선조가 끔찍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데다 보통국가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되찾겠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국제사회에서 정치·외교 측면에서도 강대국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허황된 열망과 함께. 당분간 해결 난망이라는 얘기지만, 죽기 전에 피할 수 없는 엄중한 현실 또한 어느 순간 그들이 마주 대할 현실이다. 그때의 충격과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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