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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균렬/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

201×년 11월 9일 오전 6시25분, 휴전선 근방 대기 중 방사능 측정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논, 크립톤에 이어 탄소가, 잠시 후 플루토늄이 세슘, 스트론튬, 삼중수소와 함께 다량 검출되자 당황한 검사원은 지진관측소 직통 전화로 주변 지역 지진파 감지 여부를 다그쳐 물었다. 아직 아무런 징후가 없단다.

전날, 30년 넘은 영변 5㎿ 흑연감속로 기술자들은 원자로 비상냉각장치, 비상정지, 출력제어 등을 모두 잠그고 원자로를 7％ 출력으로 운전하면서 거의 모든 제어봉을 끄집어냈다. 기술자들이 시험에 전념하는 사이 새벽 1시23분, 연쇄 핵반응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됐다. 흑연 폭발로 인해 원자로를 덮고 있던 철근과 콘크리트 뚜껑이 날아가고 원자로가 무너져 내렸다.

아침 6시25분, 흑연에서 발생한 잇단 화재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로 퍼져나갔고, 이 물질은 공기 흐름을 타고 서울 상공을 덮치고, 출근 길 시민들로 북적이는 지하철 공간에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여기는 서울, 영변은 불타고 있는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국방·정보 당국은 미국 첩보위성 동영상과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정찰기의 대기 포집 자료 분석을 바탕으로 진앙지가 영변이라는 사실을 타전했다. “영변 핵시설 폭발, 다행히 핵실험은 아닌 걸로 잠정 결론내림.” 곧바로 수도권과 경기·강원·충북·경북 지역에 방공호 대피령이 내려지고, 전국은 순식간에 시간이 멈춘 듯 불안과 정적에 휩싸였다.

영변 원자로 화재는 다행히도 다음 날 낮 12시12분에 일단 진화됐다. 한국에 이어 중국·러시아·일본 관측소는 대기의 방사능 수치가 매우 위험한 수준이라고 보고했고, 북한 당국에 해명을 촉구했다. 북한 당국은 묵묵부답. 그날 저녁 8시15분 북한 방송은 영변 핵시설에서 사고가 일어났음을 인정했고, 뒤이어 국제적 항의가 빗발쳤다. 1주일 후, 원자로에서 새어나온 방사선과 방사열에 대한 수습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사고 경위를 세계 언론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31일 밤 12시, 남측에서 급파한 기술진은 북측 결사대와 함께 두꺼운 콘크리트 속에 고농도 방사성 원자로를 매장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듬해 3월 1일, 마침내 영변과 인근 지역이 전면 격리되고 원자로 위에 석회를 부어 방사능 누출을 차단했다. 사고 원자로에 붕소, 백운석, 모래, 점토, 납 등을 500t이나 부었다. 동시에 원자로 건물 바닥에 콘크리트로 인공적 수평 방열층을 축조했다. 이로써 사고 원자로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덮여 완전 매립됐다. 가까이 있던 실험용 경수로와 재처리 공장을 비롯한 모든 시설에 대한 제염이 진행됐고, 반경 20㎞ 지역의 방사선 감시와 제염도 추진됐다. 지하수 오염 방지를 위해 차수벽 설치, 제방 축조 등 대규모 공사가 이뤄졌다.

10t에 가까운 방사성 물질이 대기로 뿜어져 나갔다. 이는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던 원자폭탄이 내뿜은 방사능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 방사성 물질은 바람을 타고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퍼져나갔고, 서쪽으로는 중국 황해 지역, 북쪽으로는 러시아 국경지대까지 흩어졌다.

물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변 원자로는 북핵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위협이다. 북한이 지난 달 말부터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낙후된 시설로 인해 사고의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우리 정부가 국민과 함께 머리 위에 이게 된 또 하나의 북핵(北核)을 걱정하고 단 시간 내에 가시적이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이유다. 거안사위(居安思危·편안할 때에도 위험을 생각함),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북한을 21세기적 해법으로 대한민국이 풀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