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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시대 최대 화두는 ‘소통’이다. 이에 따라 법원과 검찰 등 법조계에서도 대국민 소통의 일환으로 사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개혁 작업이 진행 중이다. 법원은 한국형 배심제인 국민참여재판제도를 확대하고, 검찰은 검찰시민위원회를 만들어 미국식의 ‘기소배심제’(기소권을 시민이 나눠 갖는 것) 도입 여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 참여를 통해 사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들은 피의자나 피고인, 참고인 등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법원·검찰 관계자들의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소통에 실패하는 것은 물론, 개혁 역시 완성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가니 재판’ 김용헌 광주고등법원장

2012년 12월 3일 오후 1시 50분쯤 광주고등법원 334호 법정. 텅 빈 법정 안에 점잖게 생긴 한 중년 신사가 조용히 들어와 앉았다. 그가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본 지 10여 분쯤 지났을까. 복도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20여 명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법정으로 들어왔다. “계속 이런 식이면 우리는 재판을 받을 수가 없어” “재판장이 이미 피고인이 무죄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니깐.” 격앙된 목소리에 법정 안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들은 영화 ‘도가니’로 널리 알려진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그 대리인, 그리고 도가니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었다. 오후 2시부터 예정된 공판에 참석하려고 왔지만 여간 화가 난 게 아닌 듯 보였다.

앞서 이들은 “항소심 재판부가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며 재판부 기피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이례적으로 받아들여 이날 공개심리를 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혼자 앉아 있던 중년 신사가 화가 날 대로 난 피해자 측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진작에 피해자 측과 법원이 소통을 잘 했다면 이렇게 재판부 기피신청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안타깝다”며 “앞으로는 재판에서 법원도 진심을 다할 테니 재판부의 입장도 한번 자세히 들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10분 전부터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바로 김용헌(58·사법연수원 11기·사진) 광주고등법원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요청에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당신은 또 누구냐”며 피해자 측의 얼굴은 여전히 험악했다. 더욱이 심리에 들어가자 법원에 대한 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피해자 측은 “재판장이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편견에 사로잡혀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며 “재판부가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증인신문 과정에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에도 김 법원장은 피해자 측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해 나갔다. 그러고는 “심리를 진행한 재판부도 피고인의 구속기간이 곧 만료됨에 따라 항소심이 최대한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피해자 측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피해자 측도 화를 삭이는 듯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어 김 법원장은 심리가 끝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법정에 남아 피해자 측이 재판에서 미처 하지 못한 얘기까지 다 들은 후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또 영하의 날씨에 법원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피해자 측 관계자에게는 따뜻한 차를 보내주기도 했다.

며칠 후 기피신청은 기각됐지만 피해자 측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김 법원장은 20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법원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라며 “이번 사건을 통해 법원이 먼저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들과 소통한다면 법원에 대한 신뢰는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재동 기자 trigge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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