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위대한 기업이 몰락하는 5단계가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동안 이룬 성공에 도취해 성공의 근본 요인을 잊는다. 2단계는 자만심에 빠져 더 많은 욕심을 낸다. 내부에 경고신호가 증가하지만 위기 가능성을 부인하는 게 3단계다. 위험이 누적된 4단계엔 반전의 한방을 터트려줄 ‘구원투수’를 찾는다. 묘안에 매달리다 보면 대부분 추락이 가속화되고 결국 회생불능의 지경으로 몰리는 5단계로 넘어간다. 오랫동안 기업의 흥망 사례를 연구한 짐 콜린스의 진단법이다.

한때 세계시장을 휘어잡은 소니·파나소닉·샤프 등 일본 전자업체들의 끝없는 추락은 ‘잘라파고스(Jalapagos)’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일본(Japan)과 격리된 섬 갈라파고스(Galapagos)의 합성어다. 일본 기업들이 국내시장에 안주하다 스스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특히 소니의 실패를 콜린스의 법칙에 대입하면 몇 가지 원인이 더 읽힌다. 아날로그 시대 혁신기업의 대명사였던 소니는 기존 기술에 집착하다 디지털 시대의 트렌드를 놓쳤다. 과거의 영광이 미래의 발목을 잡는 ‘레거시(legacy)의 저주’다. 고속성장으로 비대해지자 사업 부문별로 독립 채산을 실시한 결과 시너지 효과를 잃었다. 위기 상황에서 구원 등판한 미국인 CEO 하워드 스트링거는 혁신보다 단기 실적에 천착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축약하면 기업가정신의 상실이다.

디지털 시대 혁신의 상징인 애플의 최근 행보도 좀 수상하다. 창조적인 제품으로 시장 판도, 나아가 라이프스타일까지 바꾸었던 스티브 잡스가 사라진 뒤 혁신 DNA도 함께 실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잡스의 유작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품을 내놓고, 기존 성과물인 특허권에나 매달리는 애플을 두고 과거 열렬한 추종자들이 더 기대할 게 없다며 속속 떠나고 있다. 콜린스 법칙의 1, 2단계쯤이다.

시장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 잠깐 방심하면 왕좌에서 굴러떨어진다. 불확실성의 먹구름 속에서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변화를 모색하는 진취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슘페터가 말한 기업가정신의 정의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강국에 올라선 자산도 기업가정신이다. 정주영·이병철·박태준 같은 1세대 창업주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조선·자동차·반도체·철강의 초석을 놓았고, 2세대 기업인들은 품질과 통찰력을 더해 글로벌 강자의 입지를 굳혔다.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기업가정신은 위력을 발한다. 한국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불황기에 투자를 오히려 늘린 모험정신의 힘이다. 불황 때 이뤄진 선제적 투자는 호황 때의 투자보다 시장점유율 20%, 수익률 25% 가량 더 끌어올린다는 연구도 있다. 먼 미래까지 보고, 과감하게 투자하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 오너십에 바탕한 한국 특유의 기업가정신이다.

기업가정신은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어갈 원천이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유럽발 경제한파 속에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꺼리고 실적 방어에만 급급해한다. 일부 대기업은 기득권으로 과실을 따먹는 사업에 관심을 쏟는다. 중소기업은 정부의 보호막에 숨고, 청년들은 창업보다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진취성·역동성이 사라진 기업생태계는 노쇠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박근혜·문재인 대선 후보가 쏟아낸 경제민주화 공약들은 기업 발목을 잡는 규제 일색이다. 물론 공정한 거래, 투명한 경영, 사회적 기여 등을 통해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것도 기업가정신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권력이 기업의 고유한 경영행위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개입하는 건 월권에 속한다. 정치권이 특히 사악시하는 오너경영은 몇 차례 경제위기를 겪으며 해외에서 재조명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전문경영 체제보다 수익률이 높고 위기 대응력이 뛰어나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것이 사회의 혁신능력·유연성을 촉진·증진하는가? 또는 기업가정신을 억제하지 않는가?’ 이미 사그라지고 있는 기업가정신을 되살리는 게 정치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