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회원들이 지난 17일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공원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순국소년지원병 위령제’에서 제단에 꽃을 바치고 있다. 신창섭기자

“포화가 빗발치는 전쟁터.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시체가 쌓이는 참혹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현장에서 나이 어린 철없는 아이들은 가슴에 ‘어머니’를 품고 적과 맞섰습니다. 이들이 소년병입니다. 생존 소년병들은 동료 소년병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총을 부여잡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어언 6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 생존 소년병들이 떠나보낸 동료들을 위해 이렇게 환갑위령제를 올립니다. 못난 생존 전우를 꾸짖어 주십시오.” 6·25전쟁 60주년을 1주일여 앞둔 지난 17일 오전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공원 낙동강승전기념관. 전국에서 모인 노인 200여명은 이곳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차례로 국화 한 송이씩을 헌화한 후 묵념했다.

◆13회를 맞은 6·25참전순국소년지원병 위령제= 낙동강승전기념관 행사는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가 올해로 13회째 마련한 6·25참전순국소년지원병(2268위) 위령제였다. 이제는 70대가 된 ‘생존 소년병’들이 대강당에 임시 제단을 차리고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다 숨진 동료 소년병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는 자리였다.

박태승(77) 회장은 이날 추도사를 통해 “이들(전사한 소년병들)은 어린 나이에 총탄이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 ‘어머니’를 부르짖다 장렬히 산화했다”며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중학교 2~4학년에 해당하는 15~17세의 나이에 군번을 받고 군인이 됐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27일 사이에 입대, 자신의 키만큼이나 크고 버거운 총을 들고 전쟁터를 누빈 것이다.

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만 18세에서 30세에 이르는 남성을 강제 징집했으며 가두 모집, 지원 독려, 강제 징집 등을 통해 만 18세 미만의 소년병들도 모집했다.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생존 소년병들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나 흘렀지만 모두 전장의 참혹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 정부가 자신들의 실체를 오랫동안 인정해 주지 않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도 변함이 없었다.

◆선생님 말씀에 감동해서 지원 입대 =“전쟁이 난 지 10여일쯤 지난 1950년 7월 초 비상소집 통보를 받고 학교로 달려간 뒤 그 길로 지원 입대했습니다.” 대구 동구 방촌동에 사는 하명윤(77)씨. 당시 경북 영천시 신령중학교 3학년(17세)이었던 그는 교감 선생님이 ‘펜을 총칼로 바꿔 싸워 보겠느냐’고 권유해 지원 입대했다. 군인의 안내를 받고 간 대구계성학교에는 하씨처럼 대구·경북지역에서 지원한 500여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으며 경찰서장과 경찰간부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누런 국방색 옷을 입고 인민군용 따발총을 몇 번 격발해 본 뒤 경남 밀양의 육군본부 직할 유격대에 배치됐다. 한 달 동안 유격훈련을 받고 난 후에는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울진에 기습 상륙하는 등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전투 중 총탄이 철모를 관통하는 등 여러 차례 생사 고비를 넘겼으나 용케 살아남았습니다.”

하씨는 1954년 7월 제대 후 다시 학교에 다녔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비누, 성냥 등을 파는 행상을 병행해야만 했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순 있었으나 그 이상 공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고교 교사의 꿈을 결국 제대 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 “전쟁터로 간 어린 저를 밤낮으로 걱정하시던 부모님이 제대 후 4년 만에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효도를 제대로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에 살고 있는 이승환(77)씨는 6·25전쟁 발발 당시 대구공업중학교 전기과 3학년(17세)이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이끌려 대구 수성국민학교 제5교육대대에 입소했지만 입소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이는 군 입대 전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전화 교환, 전화선 연결 훈련 등을 받은 후 통신병으로 전쟁터를 누비다 1954년 4월 제대했다. 그는 “원래 꿈은 학교 공부를 마저 마친 후 전기 관련 사업을 벌이는 것이었지만 제대 후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모두 포기했다”고 말했다.

◆농사짓다 끌려가 =“한참 논을 일구고 있는데 소집명령이 떨어져 면바지 차림에 짚신을 신고 등교했더니 학생들을 군용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더군요.” 1950년 7월25일 대구 수성구 고산동 옛 고산고등공민학교 3학년(17세)이었던 장성곤(77·대구 수성구 연호동)씨는 10일 동안 대구 남산국민학교에서 700여명과 일제 장총 사격훈련을 받은 후 6사단 9연대에 배속돼 경북 상주읍내 전투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는 부대가 인민군에게 포위되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곤욕을 치렀다. 장씨는 “‘혹시 전사하거든 물 한 사발이라도 떠 놓고 제사 지내 달라’는 유언을 전우들에게 남긴 후 밤새 전투를 벌이면서 상주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 영천 시가지전투 등에 참여했다.

대구 달서구 본리동에 사는 한익근(77)씨도 17세 때인 1950년 10월 대구 동구 율하동 집에서 농사짓다가 강제 징집됐다. 그는 1951년 2월 경북 안동시 임동면 산자락에서 인민군의 수류탄을 맞았으나 페니실린을 투약하면서 끝까지 싸웠다. 결국 1953년 8월 부산 토성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제대해야만 했다. 그는 이후 의족을 단 채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부상에 대해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다가 입은 상처이기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일본 가자는 말에 따라나서 = 울산 북구 연안동에 사는 백수정(75)씨는 1950년 8월27일 당시 중학교 3학년인 15세였다. 백씨는 친구 3명과 함께 모처럼 대구시내로 구경 나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군인들의 ‘일본으로 함께 가자’는 꼬임에 빠져 입대하게 됐다. 군인들의 말만 믿고 따라나섰다가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들은 경남 밀양시 삼랑진에 있던 제10교육대에서 간단한 기초훈련을 받은 후 육군 1사단 1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으로 대구 팔공산전투에 참여했다.

백씨는 경기 문산, 평양, 평북 운산, 평남 순천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3~4일 동안 굶기는 다반사였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전쟁이 끝난 1954년 5월 제대했다가 곧바로 재입대해 1958년 11월까지 군에 복무했다.

◆때늦은 정부 차원의 소년병 인정= 수많은 소년병들이 정식 군인 신분으로 전사하거나 자신을 희생해 가며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만 정부는 오랫동안 이들의 실체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에 따르면 생존 소년병들이 13년 동안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소년병의 실체를 기록한 1000장의 병적증명서를 직접 발굴, 청와대와 국민권익위원회,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등에 탄원서를 낸 최근에야 정부는 이들의 존재를 자발적인 자원 입대를 의미하는 ‘소년지원병’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윤한수(75)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은 그러나 “정부가 ‘병역 의무가 없는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아직도 실체 인정에 인색하다”면서 “당시 자의 반 타의 반 혹은 반강제적으로 입대한 소년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소년지원병’이 아닌 ‘소년병’으로 불리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대구 = 박천학기자 kobbla@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 5월 소년병들이 전투에 투입되기에 앞서 중기관총 분해 및 조립 훈련을 받고 있다.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