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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타임머신’의 H G 웰스가 쓴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The Country of the Blind)’는 에라스뮈스의 철학적 잠언, 즉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다(In the country of the blind, the one-eyed man is king)’에서 착안했다고 하지요. 주인공인 누네즈는 에콰도르의 깊은 산을 등반하다가 실족합니다. 그곳에서 누네즈는 ‘눈먼 자들의 세계’를 발견합니다.

독재자의 폭압을 피해 사람들이 피난처(Haven)를 만든 것인데요, 지진이 나면서 계곡 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낙원(Heaven)이길 바랐던 그곳에 원인 모를 질병이 퍼졌고, 신생아들까지 속속 실명해 결국 눈먼 자들만 사는 세계가 된 것이지요. 누네즈는 그들을 가르쳐 ‘왕’이 돼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본다는 게 뭔지 모르는 눈먼 자들은 그의 뜻을 이해 못할뿐더러, 그가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망상이 뇌를 감염시킬지도 모른다며 그에게 눈 제거 수술까지 강권합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웰스의 단편소설에서 착안한 것 같습니다. 사라마구는 ‘눈먼 세상에서 당신만 볼 수 있다면? In a world gone blind, what if you were the only person who could see?’이라는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데요, 볼 수 있기를 포기한 ‘눈먼 자들의 나라’와 달리 잃어버린 눈을 되찾으려 발버둥 치는 인간군상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요. 실명(實名)이 없는 사람들이 실명(實名)이 없는 도시에서 연쇄적으로 실명(失明)하고, 결국 눈먼 자들은 정부가 급조한 수용소에 격리됩니다. 그런데 안과의사의 아내(줄리앤 무어)만이 실명하지 않는군요. 왜일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수용소는 포화상태가 되고, 급기야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합니다. 눈이 안 보이자 사람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돌변한 것이지요. ‘보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극단적인 상징일 것입니다.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무서운 질병이니까요. 눈을 잃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눈이 보일 때 보지 못했던 가치들’이 지금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안과의사는 “사람의 몸에서 그나마 영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게 바로 눈이야(People’s eyes are the only parts of the body where a soul might still exist)”라며 안타까워하고, 그의 아내는 영혼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극진히 보살핍니다. 자기에게 의지하는 타인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눈과 귀와 가슴이 돼 주며, 그들이 덜 불행해지게끔 사랑과 희생으로 헌신합니다.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긴 채!

인간 본성의 고귀한 특성인, 그녀의 한결같은 관용과 배려와 이타주의가 실명(失明)을 막아준 것은 아닐까요? 이 고귀한 교훈을 우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여우가 어린 왕자와 헤어지기 전 왕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밀을 가르쳐 주는 장면에서 말이지요.

“귀중한 비밀을 가르쳐 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봐야만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Only that which is invisible is essential).”

작가, 외화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