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모이면 정치 이야기를 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당파성으로 나뉘어 싸움을 한다?’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안줏거리’가 정치권 이야기고, 선거 결과를 놓고 주먹다짐도 불사하는 정치 과잉의 한국 사회. 분파주의, 편가르기 정치, 패거리 정치로 불리는 ‘정치적 당파성’은 지탄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정치 분야의 후진성이 나라를 망쳐왔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압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권력 투쟁에만 몰입하는 정치 행태를 보이면서도, 민주주의 가치 실현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회. 또한 다계층의 복잡 사회로 사회통합에 대한 요구가 많은 반면, 정치적 당파성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사회. 이렇듯 모순적인 정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당파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전문가들은 당파성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일제가 식민사관을 통해 의도적으로 조선 왕조를 폄훼하고 민족성을 혐오하도록 집요한 작업을 벌인 여파가 오늘날에까지 미치면서 당파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지닌 당파성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21세기에 걸맞은 모습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당대의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열정의 또 다른 표현인 ‘당파성’이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 강화로 승화될 수 있다.

이번 ‘4·9 총선’ 결과도 건전한 당파성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엄태석 서원대 교수는 “실패한 진보에 대한 심판으로 보수가 개헌선(200석)을 넘는 203석을 차지했지만, 박근혜 전 대표 그룹에게 60여석을 주어 보수 간 견제하도록 했다”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 같은 결과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진단했다. 이념전쟁에서 보수가 압승하도록 하되, 보수 간 당파성 경쟁을 유도했다는 것이 엄 교수의 설명이다. 지난 2002년 ‘탄핵 폭풍’ 속에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게 과반(152석)을 주었지만 한나라당에게도 독자적으로 개헌 저지(121석)가 가능하도록 했고, 5·6공 시절 여소야대 정국이 이뤄진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위민(爲民)을 지향하는 권력 투쟁=우리의 당파성 역사는 꽤나 길어 보인다. 조선 시대 초기 훈구파와 사림파 대결이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림파의 내부 분화로 이어진다.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한다. 후기에는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와 남인 간 대결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 성호(星湖) 이익 선생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당쟁”이라고 한탄을 했을까. 그러나 이는 극단적인 당쟁의 모습일 뿐 당쟁의 진의는 아니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재야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이덕일씨는 “조선 시대 당쟁은 ‘위민(爲民)’을 지향하는 차원 높은 정치를 펼치기 위한 정파 간 권력 투쟁”이라며 “당쟁이 후일 격화됐지만 양단의 격론을 조절하고 상대를 공존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노력 또한 많았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당쟁이 심했던 시기에 부정부패가 거의 없었던 것은 당파성이 갖고 있는 건강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덕일씨는 “‘싸움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기마 민족 기질이 남아 있는 우리 민족에게 당파성이 강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면서 “다만 내부 투쟁에 그치지 말고 이 같은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시킬 경우 엄청난 민족적 역량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생산적 논의로 민족적 에너지 결집해야=외국의 사례를 보면 당파성이 망국병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보다 분명해 보인다. 이정희(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이 당파싸움으로 선진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한 예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치적 당파성이 생산적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정치싸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총선 투표율이 역대 총선 최저치인 46.1%를 기록했듯이, 정치에 대한 열정이 책임 있는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이 회장은 “어느 국가든 갈등은 있기 마련이고, 갈등은 반복된다”면서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의 에너지로 만들 수 있는 정치구조가 있느냐, 없느냐가 선진국의 조건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정치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 정치적 ‘열정’은 넘쳐흐르지만 이를 한데 합칠 수 있는 ‘열정의 용광로’가 없다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정치 대결 구조가 철학과 이념, 가치 경쟁보다 지역이나 거물 정치인 중심으로 형성돼 갈등이 증폭돼 왔다”며 “정치 지형이 이슈와 가치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인들은 ‘수신(修身)’한 뒤 ‘평천하(平天下)’했던 옛 선인들의 도(道)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했다.

유병권·권로미기자 yb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