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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륜사 조실 혜해(慧海·87)스님을 만나기 위해 경북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를 찾은 날, 전국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많은 비가 내렸다. 유서깊은 신라왕릉도, 절집의 대웅전이며 석탑도 비에 흠뻑 젖었다. 지금부터 1500년 전인 서기 527년, 이 곳에 절을 짓는 이차돈의 목을 베었더니 목에서 흰 젖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했던가.

절집 마당을 바삐 걸어가는 비구니 스님에게 노스님 뵙기를 청하자 대웅전 왼쪽의 살림집 같은 건물로 안내했다. 당호는 법기암(法起庵), 노스님이 금강산에서 입산할 때의 암자명이었다. 안내한 이가 나지막이 스님을 부르자 작은 체구의 노스님이 어린 아이처럼 맑게 미소 지으며 기자를 맞이했다. 150㎝도 안 돼 보이는 작은 몸, 24세 때인 1944년 7월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으로 입산했으니 법랍 63세. 그 작은 몸에 한국 현대 불교의 비구니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터였다.

현재 생존한 스님으로는 드물게 금강산에서 입산한 스님은 1940년대의 효봉스님과 성철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것을 시작으로, 그 뒤 60년간 동안거와 하안거를 거의 거르지 않았다. 조계종 총무원의 중진스님들이 한국 최고의 비구니 선객이라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오랜 수행 덕이었을까, 90이 가까운 나이에 60~70년 전의 일을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하는 오랜 수행 덕이었을까, 스님은 인터뷰를 하는 짧지 않은 시간 꼿꼿하게 앉아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금강산엔 눈이 산처럼 쌓이고

스님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안흥면. 정주군은 일제 당시 오산학교가 있던 곳으로 기독교 문명의 세례를 받은 민족 선각자가 수없이 배출된 곳이다. 하지만 신교육과 기독교 바람이 분 곳은 정주군의 일부였을 뿐, 스님이 살던 농촌 마을과는 거리가 멀었다. 벼농사든, 목화 농사든 산출이 나는 대로 공출하는 것에 허리가 휘었고,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아래로 남동생 하나를 둔 1남 3녀의 셋째 딸로, 5살 때 어머니, 19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하나 남은 남동생마저 결혼시킨 뒤, 금강산으로 출가를 단행한 것은 엉뚱스럽게도 사명대사처럼 도통해 일본놈들을 이 강토에서 몰아내고 싶어서였다.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같은 큰 절도 많은데 왜 신계사였나요?

“금강산에서 처음 본 절이 신계사였지. 그 때 신계사에는 대처승이 살았고, 법기암은 비구니들만 20명 정도 사는 작은 암자였어요.”

하지만 법기암은 만만찮은 장소였다. ‘화엄경’에 나오는 법기보살은 금강산 1만2000봉우리마다에 머무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예부터 금강산의 사찰이나 암자엔 법기보살을 모셨고, 법기암은 그 법기보살이 나타난다는 곳이었다. 법기암 뒤에는 판사직을 벗어던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스님이 스스로 문없는 한평짜리 흙집을 짓고 들어가 정진하다 2년4개월 만에 깨달음을 얻은 뒤 벽을 차고 나왔다는 토굴이 있었다. 효봉스님이 무문 토굴 수행을 할 당시 하루 한끼씩 밥을 가져다 나르며 수발하던 대원스님이 스님의 은사였다.

낮에는 부엌일이나 밭일 따위를 하고 밤엔 천수경을 외우는 것으로 절집 생활을 시작했다. 그 해 겨울 눈이 한없이 내렸다.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3, 4일간 계속 내리는 눈이었다. 지붕과 마당에 눈이 산처럼 쌓였다. 스님은 눈을 치우면서도, 부엌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급했다. 빨리 참선을 해야 도를 통할 터였다. 그래, 법기암 생활 1년 만에 내금강 유점사로 옮긴 것은 참선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금강엔 선방이 많았다. 하지만 유점사에서 ‘무(無)’자 화두를 받고 정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바뀌었다. 해방이 되고, 곧 이어 공산 치하가 된 것이다. 공산 당국은 스님네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행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이들을 얼마간 더 견디다 밤을 도와 38선을 넘었다. 1946년이었다.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에서 두어해 머물다 해인사로 향했다. 당대의 선지식 효봉스님이 청담, 구산스님 등과 함께 가야총림을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바다 건너 피안으로 가자. 한 걸음, 두 걸음….

“전후 좌우의 모든 대중이 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이로구나! 이 자리에서 문득 한 생각을 일으키면 곧 진신(眞身)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번 겨울 안거 동안에 이 산승(山僧)은 여러 대중과 함께 한 배를 타고 물결 일지 않는 바다를 건너 바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리니 대중은 맹세코 다시는 진흙을 묻혀 물에 들어가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효봉스님이 1948년 10월 가야총림 동안거 결제 때 한 법어 중 일부다. 결제할 당시 스님은 입산 5년차로 한창 공부가 익어갈 때였다. 비구니들과 함께 국일암에 머물며 정진을 계속했다.

해제 뒤, 스님은 내친 김에 문경 봉암사를 찾아간다. 성철, 향곡, 자운스님을 비롯한 당대의 수좌들이 결사를 만들고 정진하며 선풍을 드날리던 곳이었다. 한국판 선의 황금기, 스님은 그 뒤 문경의 비구니 암자인 윤필암에 머물며 봉암사로 철스님(성철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가곤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점촌으로 걸어나온 뒤 석탄차를 얻어 타고 가은까지 가서 다시 절까지 걸어야 하는 먼길이었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철스님의 법문은 그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철스님이 무슨 법문을 하셨나요?

“뭐, 중 노릇 잘하라는 것이었지.”

―어떻게 하는 것이 중노릇 잘하는 것인데요?

“모든 것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는 것이었지. 내가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든 모두 나의 업 때문이라면 누구를 원망하겠어?”

스님은 효봉스님과 성철스님의 회상에서 공부하던 국일암과 윤필암 시절을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도 짓고, 탁발도 나가야 하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수행 하나만은 철저하게 했던 시절이었다.

차나 한 잔 드시게!

그 시절도 잠시, 6·25 전쟁과 이어진 정화 운동으로 불교계는 거센 홍역을 치른다. 정진하던 스님네들도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이름난 스님들도 서울을 자주 오르내렸다. 그래도 청정 비구와 비구니들의 수행을 향한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기왕 비구니 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던 수덕사 견성암과 해인사 국일암을 비롯, 그 사이 회룡사, 범어사 대성암,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동화사 부도암, 대원사 동국제일선원, 석남사 정수선원, 동화사 양진암, 동화사 내원암 선원 등 전국 각지에서 비구니 선원이 중창되거나 개원됐다.

일찍이 만공스님에게 깨침을 인가 받은 법희(法喜·1887~1975)스님과 만성(萬性·1897~1975)스님을 비롯, 선경(禪敬·1904~1996)스님, 계명(戒明·1907~1965)스님 등 깨달음을 인가 받았다는 비구니 스님들의 소문도 퍼지기 시작했다. 석가모니는 비구니의 출가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비구니도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비구건, 비구니건 열심히 정진만 하면 누구나 도를 깨칠 수 있을 터였다.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나요?”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공부라 말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선사들은 깨달음을 인가하고 법맥을 전수하고 그러잖아요.”

“떡이나 드시게!”

떡이나 드시라? 분명히 눈앞에 떡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인터뷰 중의 기자가 떡을 먹을 만큼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앉은 이는 60년 이상 선방에서 화두를 들었던 노선객. 당나라 조주 종심선사의 ‘끽다거(喫茶去)’란 화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두 사람의 선객(禪客)이 조주스님을 찾아와서 도를 물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그대는 여기에 온 적이 있었나?”라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조주가 말했다.

“차나 한 잔 드시게”

이번에는 또 다른 한 명에게 물었다.

“그대는 전에 여기에 와 봤던가?”

“예. 온 적이 있습니다.”

“차나 한 잔 드시게”

곁에서 이를 지켜본 원주스님이 끼어들며 물었다.

“스님, 전에 온 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있는 사람에게도 차나 마시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조주스님이 원주스님에게 말했다.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게나.”

노스님의 화두가 조주선사의 ‘무(無)’자이니 당연히 조주의 ‘끽다거’에도 익숙할 터, 그렇다면 ‘떡이나 먹으라’는 말은 혜해스님 판 ‘끽다거’인가. 질문을 바꾸었다.

“화두는 성성한지요?”

“떡이나 먹으라니까.”

“저는 기독교인이라 알아듣지 못합니다.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회상에서 공부하는 스님들 가운데 깨달음 가까이에 이른 이는 있습니까?”

“그럼, 있고 말고!”

스님은 제방 비구니 선원을 돌며 정진하다 1970년대 흥륜사가 복원되고 선원이 들어서자, 30여년 선원장으로 주석하며 비구니 수좌들을 지도해 왔다. 노스님은 90이 가까워진 지금도 결제철이면 매일 함께 입선해 한두시간씩 화두를 든다고 한다.

허욕을 버려야지, 내 직분에 만족하고.

―스님 출가하실 때와 요즈음 비구니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비교할 수가 없지. 모두 대학, 대학원 마치고 그 좋은 직장들 그만두고 오는데. 오로지 깨달음 얻겠다는 서원 하나 가지고.”

― 승가엔 아직 팔경법(八敬法·100세 비구니가 새롭게 계를 받은 비구에게 절을 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비구니가 지켜야 할 8가지 법)으로 대표되는 남존여비가 여전한데….

“사람 몸 받으면서 남자되기 어렵고, 중 되기 더욱 어렵고, 정법 배우기는 더더욱 어려운데, 비구들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지.”

―출가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좀더 어린 나이에 출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

짧지않은 시간, 우문(憂問)에 시달리는 게 귀찮아진 것인가, 스님의 답이 단문으로 바뀌어갔다. 세상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스님은 빈부격차니, 계층 갈등이니 뭐니 해도 노스님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 근거 중의 하나로 그는 정 할아버지(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같은 부자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남북 왕래의 물꼬를 튼 일을 꼽았다. 덕분에 영영 못가보리라고 생각했던 금강산에도 갔던 스님은 요즘 자주 자신이 출가한 신계사에 머문다고 했다. 신계사 아닌, 현대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매일 신계사를 왕래하는 생활이지만 그곳에 자꾸 가고 싶다고 했다.

신계사에서 남북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이 사이, 자신이 머물던 법기암터에도, 효봉스님의 토굴터에도 몇 차례나 들렀다고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얼마나 좋은가!”

―사바 세계에 있는 이들에게 한 말씀….

“없어요. 떡이나 먹지 않고.”

재차 청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업(業)으로 세상에 태어나, 업이 일어나는 대로 살아가며 육도윤회(六道輪廻·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를 윤회함)를 계속하는 것이 사바 세계 사람들이지. 그러니 괴로움의 바다지요. 무엇을 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허욕을 버려야지, 내 직분에 만족하고.”

―앞으로 꿈이나 계획은.

“공부할 뿐!”

인터뷰를 끝내자 스님은 손수 전화기를 들고 콜 택시를 불렀다. 노스님을 향해 두손을 모아 고개 숙인 뒤 법기암을 나서자 문 앞, 이차돈이 꽃비를 내리게 했던 순교터엔 불두화가 하얗게 지고 있었다.

경주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