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격사건 현장인 버지니아 공과대학으로 달려가는 길은 심란했다. 17일 새벽(이하 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남서쪽으로 250마일(400㎞) 가량 고속도로를 달려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시의 대학 교정에 다가갈수록 범인의 윤곽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캠퍼스로 접어들 때쯤인 오전 9시 현지 경찰은 이 학교의 콘퍼런스홀에서 ‘범인은 한국학생 조승희’라고 최종발표했다. 그 순간 32명의 학생들을 숨지게 한 한국인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보복폭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싹터올랐다.

애팔래치아산맥의 블루리지산 자락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교정에 들어서자, 콘퍼런스홀 앞에 수십대의 위성안테나 중계차량이 빈틈없이 주차해있었다. 대학 관계자들과 미 언론인들은 기자가 한국인인지 여부에 무관심했다. 대학 관계자들과 경찰은 외국기자 신분을 확인하면서 친절했다. 17일 오후 대강당과 미식축구 경기장의 추모식에서 몰려든 수천명의 학생과 주민들은 한국인, 최소한 아시아인 남자임이 분명한 기자를 보고서도 전혀 눈길을 주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추모식장 근처에서 만난 케빈 슈미트(1학년)는 “이번 사건은 한국인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면서 “한국에서 그런 걱정을 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범인 조승희씨가 같은 지역인 패어팩스 카운티의 헌든 출신이라는 슈미트는 “우리는 모두 함께 놀랐고 모두 함께 슬퍼하고 있다”며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보복공격 같은 걸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그는 “(범인이) 패어팩스 센터빌 출신이라는 사실을 듣고 그 지역 고등학교인 웨스트필드고나 센터빌고를 나온 내 미국인 친구들도 모두 놀랐다”며 “우리는 그가 비슷한 동네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범인 조씨가 생활했던 하퍼스홀 기숙사 앞에서 만난 백인 남학생(2학년)은 “이 사건으로 한국인이나 아시안에 대한 내 인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며 “이는 국적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묻자 “남한은 좋은 나라이고 북한은 나쁜 나라 아니냐”며 빙긋 웃었다.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한국계 마이클 리(1학년)군은 “조승희를 만난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몰랐다”며 “어제 사건 이후로 미국 친구들의 시선이 특별히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모식장으로 가던 한국인 여학생 3명과 남학생 2명을 함께 만났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큰 그늘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워싱턴 인근 출신이라는 1학년 여학생은 “부모들이 자꾸 집으로 오라고 하지만 여기를 굳이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계 학생들은 모두 조씨를 만난 적도 없고 알지 못한다고 했다.

기숙사 앞에 앉아 있던 중국계 2학년 여학생, 베트남계 1, 2학년 남학생은 “교정에서 특별히 인종적 차별을 느낀 적이 없다”며 “이 문제로 아시안들이 나쁜 일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수처럼 보이는 40대 초반의 미국인이 있어 다가갔더니 애틀랜타 본사에서 파견된 CNN기자였다.

그는 워싱턴에서 온 케이트라는 동료 여기자와 함께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이 문제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 사건을 여기서 교육 받은 학생의 문제라고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온갖 나라 사람과 인종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나라”라며 “국적이나 인종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추모식장에서 만난 미국인 할머니는 한국 기자 일행을 알아보고 “걱정하지 마라”며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라고 다독거려 취재진을 감동시켰다.

이날 AP등 통신사들은 전날 일부 미국언론에서 중국계의 범행이라는 추측보도 때문이었는지 ‘범인은 남한 출신’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범인은 워싱턴 근교 출신 버지니아공대 학생’이라고만 제목을 달았다.

블랙스버그 = 최형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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