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10년. 구조조정을 당해 눈물을 흘리며 기업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흔들던 때부터 수출 3000억달러 달성이라는 금자탑을 이루기까지 기업들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달려왔다. 외환위기 충격파가 본격화된 1998년 산업계 전반의 구조개혁과 고금리 정책으로 실업자가 150만명에 이르고 산업기반 붕괴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저력과 경쟁력이 만만치 않음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고도성장 신화에 이어 세계가 또 한번 놀라는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과감하게 변신한 기업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됐다.

1997년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에서 시작된 대기업 연쇄 도산은 경제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충격파를 던졌다. 1998년 55개 기업이 퇴출된 것을 시작으로 17개 대기업을 포함해 전체 기업중 4만개가 무너졌다. 산업활동은 정상 궤도를 이탈했다. 1999년에는 당시 재계 2위이던 대우가 침몰해 ‘대마불사’의 신화가 막을 내렸다. 대우는 세계경영의 기치를 내걸고 동유럽 시장 등으로 거침없이 진출했다. 그러나 ‘부실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순간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대우침몰 이후 한국경제가 다시 재도약의 길에 나서기까지 산업계는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번갈아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통주력산업과 정보기술(IT) =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진입이후 10년간 극심한 침체와 빠른 회복을 반복하면서 한국 산업계는 패러다임 변혁을 겪었다. 국내산업계는 정보기술(IT) 부문과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전통 주력부문이 교대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면서 외환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IT산업이 높은 성장률을 보여 대규모 구조조정과 산업재편으로 빈사상태에 있던 전통주력산업의 침체를 보완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40% 안팎의 고성장을 보였다. 1999~2000년 중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차지하는 IT산업은 30%의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한국경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2001년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자 전통산업이 살아났다. 세계 경제 회복과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 부상은 신용카드 버블붕괴로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한국경제에 돌파구를 열어줬다.

또 외환위기 이후 벤처기업이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2000년초 거품이 꺼지고 각종 게이트마저 터지면서 존립기반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빠졌다. 이후 구조조정기를 거쳐 최근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벤처기업 수출은 지난해 이미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세계 최강 기업으로 떠오른 삼성전자와 전자산업분야에서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고 있는 LG전자, 대약진을 통해 세계 톱5를 목표로 질주하고 있는 현대·기아자동차, 세계 철강업계 빅 3중 하나인 포스코와 조선업계, IT업계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위기돌파의 주역을 맡았다.

‘좋은 인재 한 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천재경영론’도 주효했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과 기업에서 활동하다가 한국행을 택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256MD램을 개발해 일본을 추월하는 주역이 됐다. 지난해 40나노 벽을 깬 32？？낸드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메모리 신성장론(일명 황의 법칙)’을 7년째 입증했다.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사장의 신화도 눈부셨다. 휴대전화 애니콜을 세계 최고의 상품으로 끌어올렸다. IMF극복의 효자상품으로 자리매김시키기도 했다. 하이닉스반도체도 워크아웃을 앞당겨 마친데 이어 최근 실적이 크게 신장해 한국 산업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재기신화를 이룩한 기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997년 171억달러에 머물던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362억달러(추정치)로 배 이상 수준으로 급증했다.

◆자동차, 철강, 조선 트로이카도 맹활약 = 자동차업계도 경이로운 성장으로 외환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대우자동차·쌍용자동차·삼성자동차, 현대정공, 아시아자동차, 대우국민차 등은 좁은 내수시장에서 불꽃튀는 과잉 출혈경쟁을 벌였다. 이후 1997년 7월 부도가 발생한 기아자동차는 국제입찰을 거쳐 1999년 3월 현대자동차에 인수됐다. 국내 자동차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수와 자본 제휴를 통한 외국자동차 기업의 국내 진출이 두드러졌다. 2002년 10월 GM대우차 공식 출범으로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은 일단락됐다.

이후 국내 최대 자동차 그룹이 된 현대·기아자동차는 자동차 본고장인 미국에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기술력 향상과 대형화·전문화를 통해 IMF 외환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한 셈이다. 도요타 관계자들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백미러를 보고 있는데 빠르게 쫓아오고 있는 것은 현대자동차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급부상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김준규 팀장은 “한국자동차산업계는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내적 성장도 이뤄내 품질 문제가 완전히 개선됨에 따라 브랜드가치가 크게 높아졌다”며 “부품업계 기술력 향상으로 올해 자동차 부품 수출도 1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수익성 측면에서 세계 철강업계의 정점에 섰다는 평가를 듣는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업계도 외환위기 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포스코는 해외에 생산거점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승부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취약한 재무구조 등으로 부실화됐던 많은 철강업체의 매각이 완료돼 경영이 정상화됐다. 2002년까지 한국제강, 삼미특수강, 강원산업, 환영철강 등의 매각이 완료됐다. 2004년 10월, 현대제철(당시 INI스틸)·현대하이스코가 한보철강을 인수하면서 철강업계 구조조정이 일단락됐다. 현대제철은 ‘국내 제2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중이다.

현대제철은 오는 2015년에는 1200만t까지 설비규모를 확충해 세계 6위의 철강엄체로 도약할 계획이다.

일관제철소 1호기가 2010년 가동되면 한국철강업계 판도가 다시 한번 바뀔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계는 외환위기 직후 국가 신인도 하락으로 수주가 급감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경쟁력 향상, 액화천연가스(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 생산효율화 등으로 외환위기를 넘어섰다. 1999년에는 6년 만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1위 조선국 자리를 탈환했다. 2006년은 국내 조선산업이 세계 1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조선업계 ‘빅3’는 2005년 250억달러, 지난해 370억달러 등 2년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수주대박을 터뜨렸다. 이같은 상승기조는 앞으로도 10여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너무 빨리 터트린 샴페인 = 외환위기 이후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등 8개 산업분야가 정부 주도로 사업교환(빅딜)과 매각을 단행했다. 이같은 구조조정은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중복·과잉투자의 짐을 덜어내는데 기여했다. 기업수가 줄어들고 부실기업이 퇴출됐다. 해당업종의 대형 전문화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기대보다 빠른 경기회복으로 정부와 기업 자체의 구조조정 의지는 크게 후퇴했다. 그 사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한국산업을 맹추격하면서 해외시장에서 한국보다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게 됐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은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추진한 결과, 기업과 금융부문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 선진화되고 있지만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공공, 노동 부문의 개혁의지는 다시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한국기업들의 사업전망이나 투자 성향이 악화돼 설비투자 증가율이 크게 떨어진 점도 한국경제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