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60, 70년대 ‘동네축구’를 해봤다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공을 좀 찬다면 모두를 센터포워드를 희망했다. 실력대로 공격진이 짜지면 다음 순으로 수비, 그리고 골키퍼는 당연히 가장 못 하는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축구도 수비와 골키퍼가 약한지도 모르겠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해 두 게임에서 무려 16골을 허용해 오히려 유명해진 홍덕영(2005년 타계)씨를 제외하곤 초창기 한국의 골키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수는 없는 것 같다. ‘외로운 수문장’으로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선수는 이세연(63·호적상으론 2년 늦은 45년생)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단신(1m76)이었지만 온 몸을 내던지는 투혼에 찬 선방으로 국민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이세연씨를 지난 10일 그가 살고 있는 경기 고양시 용두동 우묵골에서 만났다. 서오릉 건너편 숲 속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대지가 250평이나 되는 전원주택이다.

황해도 은율에서 1·4후퇴때 내려와 어렵게 성장한 배경 때문에 널리 알려진 ‘성깔’과는 달리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잘했던 그는 80년대 초반 신탁은행 코치를 할 때 우연히 그 땅을 사게 됐다. “서오릉길이 당시 팀의 구보 코스였는데 어느날 길가에서 아낙네가 울부짖고 있었어요. 사연을 물어보자 ‘남편이 택시기사인데 사고를 내서 합의를 해야하는데 800만원이 부족하다’고 해요. 그러면서 자기 집을 사달라고 사정합디다. 사정이 딱해서 선수를 시켜 1000만원을 찾아와 줬어요. 서초동 27평 아파트가 2000만원 수준일 때이니 그래도 큰 돈이었죠. 집에 와 마누라한테 오늘 이런 선행을 하고 땅을 샀다고 하자 ‘무슨 땅인지 문서라도 보자’고 하데요. 그냥 집만 보고 왔지 받은 게 있어야지. 다음 날 그 집에 찾아갔더니 그 아주머니가 ‘경황이 없어 돈만 받았다’며 서류를 주더군요. 당시야 비포장길에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돈이 급해 팔려고 해도 작자가 나서지 않아 팔지도 못했어요. 6남매중 막내였지만 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중풍에 걸리자 의사가 공기 좋은데 살라고 권해 아예 집을 지어 이사오게 됐죠. 요즘은 평당 300만원이상 한다나.”

당시에는 기피 포지션이었던 골키퍼가 된 특별한 사유가 있었을까. “형이 축구를 좀 했는데 새벽운동을 나가면서 만만한 막내를 깨워 골대에 세워놓고 슈팅연습을 했어요. 처음에는 공을 날아오면 무서웠는데 길들여지니 축구를 한다면 골키퍼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서울 강문중(용문중의 전신) 축구부에 들어가 골키퍼를 해봤는데 키가 너무 작아(167㎝) 포기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막일을 배우러 다녔죠. 정식 골키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중3때 우연한 계기 때문인데…, 당시 김기복이 에이스였던 동북중이 우승한 후 우승기를 식당에 맡기고 외상으로 밥을 먹었어요. 이 사건으로 모두 퇴학당해 이들이 몽땅 강문중으로 전학을 오게 됐어요. 골키퍼는 다른 사고까지 있어 그나마 못 오고. 그래서 내가 불려가 골키퍼를 보게 됐죠. 우리 전력이 너무 좋아 나는 골대에 서있기만 해도 우승을 도맡았죠. 고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너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며 부르질 않는 거예요. 내 발로 한양공고를 찾아갔죠.”

이같은 설움은 이세연을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실력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매일 줄넘기를 3000번씩 했죠. 이 덕에 단신이지만 농구대 림을 한 손으로 잡을 정도로 점프력이 좋아졌어요. 줄넘기 3000번은 고1때부터 8년간 하루도 쉬지 않았으니까. 또 집 앞에 있던 중앙여고가 기계체조로 유명했는데 거길 찾아가 기계체조 훈련을 받았어요. 공중에서 볼을 잡고 회전해 떨어지는 덤블링 연습을 했는데 어깨뼈에 금이 가고 머리를 다치기도 하고…. 골키퍼가 공중회전을 하며 공을 캐칭하는 것은 당시에는 볼 수 없는 기술이었죠. 결국 1학년말에 3학년 선배를 제치고 팀의 주전 골키퍼로 뽑혔어요. 다행히 키도 1년 사이 6㎝나 자랐고.”

기계체조로 다져진 그의 공중볼 처리 기술은 상대 공격수들에게는 공포의 무기였지만 자신 역시 생명을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공중에서 공을 받아 회전을 하며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상대를 깔아뭉개는 경우가 많았어요. 체중의 몇배가 되는 충격이 상대에게 가해져 나 때문에 부상을 당한 선수가 많았죠. 그 때는 이런 경우 쾌감을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한 선수들에게 큰 죄를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우리야 ‘운동하다 죽으면 명예’라 생각하고 물불 가리지 않았으니까. 덤블링 때문에 나 역시 뇌진탕으로 죽을 뻔 한 적도 있어요. 대학시절(경희대 3년 중퇴) 한양대와 게임을 하는데 상대 공격수에게 머리를 발로 차여 15분간 의식을 잃었어요. 깨어나 경기를 마치긴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날 어떻게 경기를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요. 남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믿지 않는데 친하게 지내는 홍수환이만 ‘펀치에 맞아 두번이나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요.”

청소년대표를 지낸 그는 고교졸업 후 곧바로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상당히 파격적인 발탁이었지만 골키퍼로서의 그의 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후 11년간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세연의 전성기는 한국축구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실력은 태국이나 버마(미얀마), 말레이시아와 쌍벽을 이루는 정도였지만 온 국민은 메르데카대회나 킹스컵대회 중계를 보며 일희일비했다. 이세연의 주가가 높아진 것은 ‘숙적’ 일본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오기 서린 투혼’ 때문이었다. “내가 11년간 국가대표를 하는 동안 일본에는 한번도 진 적이 없어요. 가마모토, 스기야마, 미야모토 등이 이끈 당시 일본의 전력은 사실 우리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래도 우리가 한번도 안 진것은 ‘부모님 덕분’이었어요. 메르데카겁 같은 대회에 나갈 때면 공항까지 부모님이 따라나와 ‘일본한테는 절대 지면 안 된다’고 당부해요. 우리들도 태생적으로 반일감정이 있었는지 그들과 경기를 하면 눈빛이 달랐고 거기에 질려 일본애들이 가까이 오지 않을 정도였어요. 경기를 하기 전 선수들이 스크럼을 짜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죠? 아마 작전회의를 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저 놈(일본)들에게 지면 경기장에서 죽어서 나가자. 내일은 세관도 통과해야 하니까(??＾＾)…’ 뭐 이런 말들이 오갔지요.”

72년 메르데카컵 준결승(한국 3-0승)에서 일본의 스트라이커 가마모토가 그에게 당한 사건은 훗날 내막이 들어나면서 오히려 이세연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문전에 공중볼이 날아오는데 가마모토가 쇄도해 들아왔어요. 내가 몸을 날려 펀칭을 했는데 가마모토와 겹치며 떨어졌죠. 그런데 가마모토가 나를 깔고 누웠지 뭡니까. 꼭 씨름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팔로 그의 머리를 잡고 자세를 역전시키며 일어나면서 손으로 목을 눌러버렸어요. 숨이 찬 상태에게 목을 눌린 가마모토가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질러 경기가 중단되는 등 소동이 일어났어요. 심판이야 공으로 시선이 가 있어 사정을 몰랐고 정병탁이만 봤어요. 라디오 중계를 할 때라 실황을 보지 못한 한국에서 선수단으로 국제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었어요. 경기가 끝난 후 우상권 코치가 이례적으로 양주 한 병을 들고 와 은근히 캐물었지만 끝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몇 년 후 당시 감독이셨던 한홍기 선생이 대한민국 체육상 지도자상을 받아 회식을 했는데 그 사건이 화제에 올랐고 한 선생님이 ‘이제 다 지난 일이니 말해 보라’고 하셔서 처음으로 밝혔죠. 아 그런데 점잖은 줄로만 알았던 한 선생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야! 이왕이면 두 손가락으로 ‘눈깔’을 찔렀어야지….’ 여기까지의 사정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내 입 실수인데…. 은퇴를 앞두고 모 스포츠지에서 ‘믿을 것은 나 뿐’이라는 제목으로 45회나 내 스토리를 연재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담당 축구기자에게 ‘쓰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날 ‘손가락으로 눈깔을 찔렀어야지’라는 시커먼 제목을 달아 기사가 나왔어요. 주위에서 점잖은 분(한홍기 감독)까지 욕을 보였다고 전화가 오고 상당히 곤란했어요.”

하지만 이 기사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됐다. “70년 중반 카네기홀이나 월드컵 같은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극장식 식당이 유행했는데 내가 가기만하면 주위의 손님들이 내 자리로 술을 보내요. 업소 사회자는 또 ‘몇번 테이블 손님이 이세연 선수에게 맥주 1박스를 보냈습니다’라고 광고하고, 그러면 손님끼리 경쟁이 붙어 최고 맥주 14박스가 내 테이블에 쌓인 적도 있어요. 그걸 내가 다 마십니까? 그냥 두고 왔지. 그래서 내가 가면 술집 매상이 30%나 늘어난데요. 이 사실을 안 다른 업소 사장이 출연하는 연예인에게 ‘너는 이세연이도 모르냐’하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연예인들이 연줄을 대 한번 찾아오라고 통사정하곤 했죠. 그 덕에 연예인들과 친하게 지냈죠. 아무튼 우리 국민의 대일감정은 이같이 대단했어요.”

이씨의 부인 한정숙(60)씨는 미인으로 소문나 있다. 부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그런 이야기 많이 하던데 나도 찬찬히 거울을 보면 괜찮던데”하고 너스레를 떤다.

부인은 이씨의 고교동창 한경완(숭의여고 농구감독)씨의 연년생 동생. “고교 때 친구집에 갔다가 보고 내가 짝사랑을 많이 했어요.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장인은 ‘이세연이 축구도 잘하고 하니 괜찮다’고 하시는데 장모님이 궁합이 안 좋다고 브레이크를 걸데요. ‘호적이 두살 적게 됐다’며 원래의 사주를 댔더니 그건 괜찮게 나와 결혼할 수 있었어요.

이세연씨는 1남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승태·36)과 큰 딸(지경·35·일본 거주)의 이름이 축구와 연관이 있다. “태국에서 아시안게임과 킹스컵이 잇달아 열려 두달여 해외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죠. 배재고 교사였던 형이 내가 없더라도 이름은 지어줘야겠다며 주위 선생들에게 자문했더니 ‘태국에서 두번이나 우승했으니 이승태(勝泰)라고 하면 딱이네’해서 그렇게 정해놨대요. 귀국한 후 너무 장난스러운 것 같아 작명가에게 물어 보았더니 좋은 이름이라고 해서 그냥 사용했죠. 딸 이름은 친하게 지냈던 중국계 말레이시아 골키퍼 ‘조지경’이가 ‘내 아들 이름을 (조)세연이라고 했는데 너는 내 이름 안 붙여주냐’고 하기에 딸 이름을 지경이라고 했죠.”

인터뷰 도중 외출에서 마침 돌아온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지경이는 지금까지도 이름에 불만이 많아요. 이름은 그렇듯한데 성이 이씨라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당했대요”한다. 어찌됐건 축구와 관련된 이름을 가졌기 때문인지 승태는 연세대-대우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다 지금은 ‘IFA’라는 스포츠에이전트사를 운영중이고 지경은 배구감독과 결혼하는 등 모두 스포츠와 관계를 갖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이사, 경기도축구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 축구행정에도 관여하다 최근에는 ‘축구와 연을 끊고 전원에 묻혀 지내고 있다’는 이세연씨는 그러나 ‘국내에는 골키퍼 교육용 전문교재가 없어 집필해 볼까 한다’는 말로 축구와의 질긴 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체육부장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