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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스포츠 기자를 하면서 숱한 스타들을 인터뷰했었다. 그중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말을 남긴 스포츠인은 두 사람이다. 나에게 감동으로 남아있다고 해서 거창한 명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무심코 흘린 말일 수도 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이번 ‘스포츠 인생’의 주인공 황재만(54)씨다. 70년대 한국축구의 명수비수 김호, 김정남 콤비가 은퇴한 무렵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팀의 수비를 봤던 황재만씨를 모르는 사람도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롱 스로인의 명수’하면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황재만씨와의 첫 인터뷰는 15년 전인 1990년에 했다. 당시 그는 선교축구팀 할렐루야의 감독이었지만 만남은 축구장이 아닌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병원 재활병동에서 가졌다.

멕시코월드컵 개막을 앞둔 86년 멕시코로 선교 활동 차 원정을 다녀온 그는 열병을 앓았고 이후 한쪽 다리가 힘이 없어 처지고 걷는 데 이상을 느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자 아예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의사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말할 뿐 확진을 못했다. 축구로 밥을 먹던 사람이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건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황재만씨는 의외로 담담했고 반드시 나아서 다시 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면서 “나를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간다”는 말을 남겼다. 이상하게 그 말은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운으로 남아있다.

15년 만에 황재만씨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최근 그의 중동고 후배인 지인을 통해서였다. 얼마 전 모교 개교 100주년을 앞둔 행사에서 황씨를 봤는데 몸이 몹시 상했더라고 전하며 안타까워했다. 황재만씨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걸면서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부인(유선경씨)의 목소리는 걱정과는 달리 아주 명랑했다.

지난 1일 경기 일산의 ‘홀트일산복지타운’ 실내체육관에서 황재만씨를 만났다. 15년 전 만났을 때와는 달리 몸이 반쪽이었고 목소리가 가늘어져 귀를 기울어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최근 휠체어럭비협회 회장을 맡았다. “휠체어럭비는 경추를 다친 중증 장애인들이 하는 경기예요. 척수마비 장애인은 그나마 공을 잡을 수 있어 휠체어농구를 하지만 경추마비 환자들은 손가락조차 잘 안 움직여져 럭비를 해요. 예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 동기’였던 윤세완(46·휠체어럭비협회 전무이사)씨가 2년 전 찾아와 이런 협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회장을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몸이 극도로 좋지 않아 입원해 수혈로 겨우 부지할 때라 거절하다 윤 전무가 너무 진지하게 부탁해서 ‘몸이 나아지면 생각해 보자’고 얼버무렸는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와 할 수 없이 맡았어요. 손도 못 펴는 경추환자들이 럭비를 하면서 조금씩 손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예전에 일본에 가서 치료해 보신다고 했는데. “국내에서 확진을 받지 못해 일본 가고시마의 병원에 갔었는데 ‘HAM’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치료제가 없고 현재 개발 중이라더군요.” 부인에게 슬쩍 병세를 물었더니 “이 병은 계속 진행되는 것이라 상태가 좋아지기는 힘들다. 기관지확장증, 골다공증에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리고 이가 몽땅 빠졌다”고 한다. 76㎏이었던 체중이 지금은 50㎏. 그래도 최악의 상태였을 때 45㎏이었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현역시절에 대해 물었다. “내가 축구를 좀 늦게 시작했어요. 고향이 경기 화성군 안용면인데 수원북중 3년 때 축구부에 들었어요. 그러나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중동중으로 전학했고 중동고-고려대를 거쳤어요. 대학졸업 후에는 신탁은행-공군-할렐루야에서 선수로 뛰었고 총감독을 맡고 있던 98년 외환위기로 팀이 해체돼 그라운드를 떠났어요. 늦게 시작했지만 중 3때 청소년대표로 뽑혔으니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고려대 2년 때인 72년 국가대표가 됐고.” 현역 때 롱 스로인의 명수라고 불렸는데. “중동고 시절인 70년, 한국과 호주의 경기를 봤는데 호주선수의 스로인이 아주 멀리 날아가 아주 위협적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연습을 해봤는데 30m이상 가더라고. 이후 내 전매특허가 됐지요.” 현역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원래 수비수였나요. “처음에는 미드필더였는데 고려대에 가면서 주로 수비를 봤어요. 76년 한·일정기전 때 헤딩으로 결승골(2-1승)을 넣은 것이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고.”

부인이 재일교포라고 들었는데. “원래 고향이 부산이고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처가식구들도 다 귀국했어요. 결혼은 대학 1년 선배인 이차만씨의 소개로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결혼했어요.” 그러면서 부인에게 “우리가 만난지 얼마 만에 결혼했지”라고 묻는다. 15년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남편을 보살피고 있지만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인 유선경씨다. “82년 겨울에 만나 83년 3월에 결혼했어요. 이차만씨의 부인과 친정 쪽 언니가 친구였는데 소개해 준다고 해서 처음에는 싫다고 여러 번 뺐는데…. 그런데 한번 만나고 한 눈에 반했어요. 지금은 저렇지만 그때는 얼마나 잘생겼고 체격도 듬직했는지.” 그러면서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둘째가 축구를 한다고 하던데. “아들만 둘인데 큰애(대현)는 입대한 지 4개월 됐고 둘째(대균)가 고려대 선수예요.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내 후배가 됐는데 원래 포워드였는데 대학가서는 수비를 봐요.” “남편 수발하느라 아이들에게 신경쓸 형편이 못되는데 저 사람 학교 선후배들이 잘 챙겨준 덕이죠(부인).”

종교 때문인지 다시 걷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축구선수가 다리를 잃었는데 어찌 좌절감이 들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도들의 기도로 힘을 얻어 지금도 정신력은 강해요. 교회는 초등학교 2년 때 어머니를 따라서 나가게 됐지요. 처는 종교가 없었는데 결혼 후 믿음을 갖게 됐지요. 지금도 총각 때부터 다녔던 금호동 대현교회에 나가요. 휠체어럭비협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몸도 많이 더욱 좋아졌어요. 어찌 보면 내가 봉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힘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빠듯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회장으로서 재정적인 면에서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황재만씨는 “경추마비 환자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손발의 마비가 심해져 보급이 시급하지만 럭비용 휠체어가 대당 5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이기 때문에 선뜻 뛰어들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 협회는 시작단계라 아직 장애인스포츠단체로 등록하지 못해 널리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꼭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해 경추마비 장애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고 밝히며 뜻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체육부장 dylee@munhwa.com

■휠체어럭비협회에 도움을 주실 분은 협회(서울 광진구 구의동 정립회관 내) 윤세완(011-301-0899) 전무이사 또는 황재만(02-6738-0124) 회장에게 연락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