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일 오늘/ 우리는/ 핵폐기장 백지화, 부안군민의 승리를 선언한다/ 반핵 생명 평화를 선언한다// 돌이켜보니 어느덧 17개월이 지났다/ 7만 부안군민 한 몸 되어/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노래하며/ 매수와 폭력, 거짓과 분열을 물리치고/ 폭염과 태풍,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길…’

지난 1일 발표된 ‘부안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북 부안군민들은 이날 부안읍사무소 앞에서 ‘부안군민 승리대회’를 열었다. 지난 17개월동안 그토록 부안을 들쑤시고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가 끝났다. 11월 30일로 부안 지역에 대한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로서의 법적 자격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다. 그 대한민국 부안 사람들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하다.

부안의 상흔은 아직 여기 저기 남아있다. 눈에 보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은 더욱 커보인다. ‘부안폭발’의 진원지였던 부안읍내 부안군청 앞은 격렬했던 야전(野戰)의 흔적을 보여준다. 10여개의 컨테이너들이 바리케이드를 이루며 여전히 군청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 한쪽에는 전경막사가 들어섰고 전경들의 순찰이 대낮에도 계속된다. 그 앞, 부안군수 퇴진을 위한 1인 시위도 250일째를 맞는다.

부안군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핵운동의 본부격인 부안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부안군청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부안사태의 깊고 짙은 명암을 드러낸다. 반핵의 노란 깃발들이 성당 뜨락의 나뭇가지마다 완강하게 걸려있다. ‘핵없는 세상’을 기원하는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끈다. 철조망과 못으로 뒤엉킨 원형구조물이 부안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투영하는 모습이다.

2003년 7월14일 부안군수의 독단적 핵폐기장 유치신청을 계기로 부안사태는 불타기 시작했다. 굵직한 사건만 정리해도 숨이 찰 정도다. 핵폐기장 반대 궐기대회가 이어졌다. 시민단체들의 반대성명이 봇물을 이뤘다. 초·중·고생들의 등교거부와 주민의 고속도로 점거사태도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부상했다. 삼보일배와 촛불시위 등 시위란 시위는 모두 동원됐다. 그래도 정부는 밀어붙였다. ‘민란’으로 묘사됐다. ‘경찰계엄’이 시작됐다. 상주인구 2만4000명의 부안읍에 1만명 이상의 경찰이 진을 쳤다.

부안 사람들은 그 속에서 부안을 지켜냈다. 잃은 것이 너무 많다. 많은 이들이 다치고 전과자가 됐다. 어떤 이들은 생업조차 뒤로 한 채 핵 속에 묻혀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심리적 불안과 배신감 등 중첩된 감정에 시달린다.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이 굳어지고 찬반논란으로 생긴 이웃간 앙금도 남아있다. 모든 분야의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등 물심양면의 피해는 자못 심각하다.

잃은 것과 함께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그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주민자치의 공동체를 보여줬다. 시민운동의 참뜻과 의미를 되새겼다. 참여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체득했다. 스스로 역사를 일구며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 ‘관언(官言)유착’에 따른 여론몰이와 폭력사태에만 초점을 맞추는 언론왜곡에 대항, 주민들의 주식공모로 ‘부안독립신문’을 탄생시켰다. 편집권 수호를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안보이는 것들이 더 많이 변했다.

그 긴 터널의 어둠을 보낸 부안과 부안 사람들을 만나며 보고 들은 내용들을 정리해본 것이다. 정리라기보다는 단편적 느낌이라고 해야할 만큼 부안과 부안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겪어왔다. 부안대책위 공동대표와 ‘부안독립신문’의 발행인을 겸하고 있는 부안성당의 문규현 주임신부는 “이제 희망의 촛불을 들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동안 체험한 그 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부안군민의 진짜 저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작 나서야 할 정부는 말이 없다.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부안을 몰아붙였던 참여정부야말로 부안을 먼저 찾고 배울 때다. 1년전의 과거사도 추스르지 못할 정부라면 어디에 쓰겠는가. 하루 빨리 그들에게 안겨준 시련의 책임을 시인하고 그들과 함께 치유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한민국 부안 사람들’이 거기 있다.

[[김광원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