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은 노무현 대통령에겐 50대 나이로 보내게 되는 마지막 가을이다. 1946년생이라고 하니까 올해를 넘기면 우리나이로 60이 된다. 꼭 그의 나이만큼 ‘신생독립국 대한민국’도 여기까지 살아왔다. 국가와 정부, 그리고 국민의 허물도 많았지만 이젠 세계적으로 만만한 신생국가가 아니다. 1만달러의 국민소득에 이른 세계경제 11위의 국가, 얼마전엔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순위 9위에 올라 다시 확인한 우리의 저력들. 그런 국가적 역량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 척박한 한반도에서 역대 대통령과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만들어 낸 피와 땀의 결과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나라의 조타수를 맡은 국정최고책임자로서 국민과 역사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깊이 감사해야 한다. 나이 60을 앞둔 ‘인간 노무현’으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조타수가 된 국정최고책임자로서 하루에도 열번 백번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대통령이다”고 독백하면서 국민과 역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국민에게 ‘희망의 미래’를 얘기해야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불행해 보인다. 과거와 오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역사에 오욕의 평가를 덧칠하면서, 이 땅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젊은이들에게까지 역사에 돌을 던지고 싶은 심정을 만들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과거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피가 거꾸로 솟게하는 대한민국’이었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아테네 올림픽 때 메달을 따고 탈진한 상태에서도 “지금 나라가 어려운데 내가 딴 메달이 국민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우리 젊은이들이 메달을 따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순간 청와대는 뭐라고 했는가. 메달리스트에게 대통령 축전을 보내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유산이니 이번만 보내고 다음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메달 하나 하나에 마음을 졸이며 새벽까지 TV를 지켜보는 국민을 속상하게 하고, 그런 얘기가 아테네까지 전달돼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해도 꼭 역대정권에 대해 분풀이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것인가. 만약 노 정권에 역사와 국민이 500달러대의 국민소득, 그리고 금메달 한개도 따지 못하는 김정일 정권의 나라 형편을 물려주었다면 노 정권은 지금 누굴 또 탓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노 대통령은 지금 국정최고책임자로서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고쳐쓰는 역사학자나 감상에 젖어야 할 문학평론가의 입장과 시각이라는데 국민은 절망에 가까운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전, 주한미군 감축, 고위공직자 재산 백지신탁제, 좌익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등을 역설하는데 동원하는 이론과 논리를 들어보면 어느 하나 가릴 것없이 학자들이 골방에 앉아 찾아낸 것들과 비슷하다. 그런 테마들이 정권의 명운을 걸 국정의제라고 하고 있으니, 세계관을 달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다.

어젠 또 국가보안법 폐지를 들고 나왔다. 안보·외교·경제 등 할 일이 태산인데도 국보법 폐지가 중요하다는 노 대통령을 보면서 식솔이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족보를 들먹이며 과거를 챙기는 가장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 국민은 지금 청와대 안에 갇혀 역사 운운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살아야 할 운명인가. 대통령이 어느 날 저녁 강남의 길거리 주점에 들러 ‘강남 사람들’이 진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살펴보고, 강북에도 찾아가 맥주잔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 나라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산업현장도 바쁘게 찾아가 격려하고, 세계 강국을 숨차게 돌며 우리민족의 희망과 세계화를 말하는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은 더 좋다. 좀 낭만도 있고 훈훈한 정도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쯤 오게될지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다. 이 가을은 노 대통령에게 역사와 국민에 대해 다시한번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적어도 그런 모습만 보여주어도 다른 문제는 시비를 삼고 싶지 않다.


[[윤창중 / 논설위원]]